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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보그춘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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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아름 Sep 12. 2023

마젠타색으로 머리 물들인
당돌한 춘양의 소녀

할아버지에게 "자식 교육시키라"고 이르는 손녀

온 가족이 복닥거리는 다복한 연휴다.


서울이 고향인 윤지(가명)는 부모님을 따라 조부모님이 사시는 경북 봉화로 귀촌을 했다. 부모님의 귀촌 살이가 소확행인 것과 달리 윤지에게 이곳 봉화는 탈출의 대상이었던 것 같다. 다만, 마음에 드는 것은 딱 한 가지! 늘 이 촌구석이라고 하면서도 방에서 바라보는 풍경과 밤하늘에 쏟아지는 별들이란다. 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이 하루에도 여러 번, 계절마다 바뀌니 '우리 집 액자는 늘 근사해'라고 한다.


소녀의 창 윤지가 방에서 늘 바라보는 창이다. 비나 눈이 오는 날 또는 밤하늘에 별이 가득찰 때는 정말 환상적이라고 한다. 서울 생각이 싹 달아나는 유일한 순간이다 ⓒ 다아름
소녀가 바라보는 하늘과 풍경 윤지가 창 너머로 바라보는 풍경이다. 집에 '멋진 액자'가 걸려있다고 말하는 윤지는 천상 소녀다 ⓒ 다아름


18세 꿈많은 소녀 윤지는 틈만 나면 사촌과 친구들이 있는 서울로 튄다. 각종 콘서트를 섭렵하고 '떼춤' 촬영현장까지 쫓아다니는 그녀에게 춘양시외버스터미널은 생명의 통로이다. 그도 그러할 것이 춘양에서 동서울까지 3시간이면 가는 시외버스까지 있으니 비록 시간은 걸려도 18세 소녀에게 그리 나쁜 접근성은 아니다.


만 18세가 되던 날 주민등록증이 나왔다며 이제 자신은 성인으로 스스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으니 자기 생각을 이제부터는 존중해달라고 공히 선포를 한다. 언제는 우리가 안 그랬나?


춘양시외버스터미널 공식명칭은 춘양공용버스정류장이다. 봉화읍에 가는 버스며, 춘양면 이곳저곳을 운행하는 시내버스까지 모두 여기에서 탄다 ⓒ 다아름


음식을 만들고 상을 차리느라 분주한 가운데 어디선가 신경전이 오간다.


"니 대학 간다고 머리 그렇게 염색했나? 대학에 공부하러 가지 놀러 가나? 그럴거면 비싼 등록금 내고 학교는 뭐하러 가나?"


"삼촌! 내가 머리 염색한 거랑 공부랑 무슨 상관인데? 나의 스타일이고 표현의 자유야. 그리고 나 성인이야!"


"마음가짐이 중요하지. 입학해서 공부할 생각은 안 하고 멋 내는 것만 하고 있잖아. 그래가지고 대학 생활을 잘이나 하겠어?"


고소하게 퍼지는 음식 냄새에 어린 질녀와 삼촌의 신경전도 그저 채소, 고기를 모닥거려 꼬챙이에 꽂아놓은 산적쯤으로 여겨지는 탓인지 아무도 신경 쓰는 이가 없다. 그러다가 말겠거니 말이다.


불어터질 대로 불어터진 윤지는 입이 댓 발만큼이나 튀어나와 할배 옆에 앉는다.


"할아버지! 아니 자식이 잘못을 하면 부모가 교육을 똑바로 해야지요. 할아버지 얼른 자식 교육 똑바로 하세요."


할배는 사실 연속극 보느라 정신이 없어 윤지의 삼촌이자 그의 아들이 윤지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조차 잘 모른다. 다들 각자의 일과 만남의 기쁨에 취해 있으니 윤지의 볼멘 마음을 누가 알쏘냐.


"할아버지, 텔레비전 그만 보고요. 삼촌이 저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삼촌이 돼가지고 조카한테 그렇게 말하는 거 아니죠. 대학에 가서 꼭 공부만 하는 건 아닌데 머리 염색했다고 저한테 그렇게 막 말하는 건 정말 아니에요. 할아버지도 저한테 아무 말씀 안 하시잖아요. 그러니 불러다가 자식 교육 제대로 하세요."


올해로 90세가 되시는 할배는 매우 보수적이셔서 아직도 자녀들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는다. 그런 할배가 윤지의 헤어스타일을 처음부터 좋아했을 리는 당연히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윤지는 할배를 작업했다. '일정 기간', '반복적으로', '아주 간절하게' 말이다.


2023년의 주요 칼라인 비바 마젠타로 물을 들였다. 이러한 스타일을 계속 보여주니 할배가 학습이 되어 윤지의 붉은 머리카락을 보고도 아무런 말씀을 안하신 것이다. 사전 작업이 없었다면 아마 몽둥이로 다리 하나는 부러졌을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머리가 왜 도깨비같이 시뻘거냐고 말이다.


 

"할아버지! 왜 말을 안 해요. 자식 교육 똑바로 시키시라고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윤지와 삼촌의 대화에 윤지는 유일한 자기편 할배에게 의탁하고 있었다. 삼촌은 동네 어르신께 인사를 하러 자리를 뜬 지 오래다. 드디어 할배가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 한마디 하신다.

 


자식이 나이가 들면 말을 안 들어...


그리곤 할배의 눈과 귀가 즉시 연속극으로 향했다.


미구(여우)처럼 지혜롭고 전략적인 윤지가 할배에게 도움을 청하기보다 삼촌을 교육하는 편이 더 빠를지 모른다. 윤지의 헤어스타일을 이해시킬 실력이면 충분히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두발점검 세대인 고지식한 삼촌이 그러한 스타일을 쉽게 소화할 수 없다는 것을 윤지는 몰랐던 모양이다. 세대 간의 인식 격차는 서열로 해결되지 않는다. 죄 없는 할배만 잡고 투정하는 윤지에게 말하고 싶다.


'윤지야! 젊은 니는 말 듣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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