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세상 개복치들이여! 일하러 오시라
“저는 개복치인데요. 세상의 모든 개복치들이 춘양에 오면 완전히 치유될 수 있어요. 확신해요!“
춘양면 지역 사람들에게서는 듣기 어려운 표준어와 억양, 그리고 세련된 매너를 가진 서른두 살의 젊고 준수한 외모의 청년이 말한다. 뉴욕에 갖다 놓아도 손색없을 만큼 완전 도시남이다.
출근할 때마다 눈길, 생각의 호흡을 멈추게 하는 곳이 있다. 별달리 관종을 하려는 것도 아니지만 도로를 중심으로 사과밭이 도열 되어 있는 사이로 족히 5,000평은 넘어 보이는 거대한 비닐하우스다. 서리가 내리는 계절이 되면 어김없이 밖에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알록달록한 채소들, 가끔은 뿌리째 뽑힌 키가 큰 식물들이 거침없이 나부러 다닌다. 어느 날은 아침부터 한 뭉치의 식물들이 열매가 달린 채로 뽑혀 바닥에 던져져 뜨거운 햇빛에 타들어 가기도 했다. 멀쩡해 보이는 저것들을 가져다 텃밭에 심으면 누구라도 나눠 먹을 텐데 아까운 저것을 왜 버리나 싶기도 했다.
비닐하우스 안은 지극히 이국적인 딴 세상이다. 천장에서 내리쬐는 햇살을 듬뿍 받은 키가 큰 식물들이 레일 사이로 가지런히 줄지어 있다. 빨강, 노랑, 주황, 초록 각종 색의 열매들이 참 탐스럽게도 달렸다. 난생처음 본 파프리카다. 피망과는 다른 외래 귀화식물로 단맛이 강조된 품종이다. 키는 족히 5m도 넘어 보인다. 5월에서 11월까지 6개월은 수확을 할 수 있다는 파프리카는 가을이면 낙엽도 지고, 키가 천장 하우스까지 닿는다.
열대식물원에 온 것 마냥 근사한 식물들 사이로 작업하시는 분들이 부지런히 손을 움직여 파프리카 수확에 한창이다. 추석이 다가오는 지금이 파프리카 몸값이 가장 좋을 때다. 파프리카는 작황에 따라 평균 5kg 한 상자에 8,000원에서 최고 9만 원에 이른다. 개복치 김승천 사장의 파프리카 농장은 연간 200t의 파프리카를 생산한다. 6~8월 사이에는 가장 수확량이 많아 하루에 14시간씩 작업할 때도 있다.
”저는 호텔경영을 전공했어요. 유학 가서도 호텔관광을 공부했는데 그때만 해도 즐거웠어요. 10년 전 현실의 벽에 부딪히기 전까지는요. 한국에 돌아와 유명 기업에 취업했는데 기본급 80만 원에 나머지는 제가 영업하고 뛰는 만큼 인센티브를 받는데 최고 많아 봐야 100만 원인 거에요. 그러면 제가 죽도록 일을 해도 한 달에 180만 원 이상은 못 받는 거잖아요. 생각이 깊어졌어요. 극심한 스트레스와 때로는 불합리한 업계의 관행에 대해서요. 저에게 개복치 성향이 조금 있는 것은 알았지만 그때 깨달았죠. 진정한 개복치라는 것을요.“
스트레스가 최고치에 달할 무렵인 2015년, 개복치 김승천은 그가 태어나고 자란 봉화 춘양으로 내려왔다. 부모님 곁에서 잠시 쉬어가려고 말이다.
”그냥 아버지 옆에서 묵묵히 일했어요. 진로에 대해 고민도 많았구요. 아버지는 저희 일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지 않으시는 분인데 그 날따라 물으시더라고요.
‘너 한 달에 얼마 받지?’하고요. ‘죽도록 하면 180만 원 정도요.’ ‘너 한 달 죽도록 일해서 버는 것 아버지는 하루면 벌어. 와서 일해라’하시는 거예요. 두 달 동안 일을 하고 서울로 돌아가는데 아버지가 500만 원을 챙겨주시는데 그때 마음이 묘하더라구요, 그래서 아버지 옆으로 와서 농사일을 배우기로 했어요.“
”그럼 춘양에 내려온 이유 중에 경제적 이유가 가장 컸던 거네요?“
”처음에는요. 그런데 제가 스트레스에 완전히 취약한 개복칫과라는 것을 알고 나서 춘양은 저의 고향이기도 하지만 운명과도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파프리카와 일종의 사랑에 빠진 거죠. 제가 무슨 말을 해도 묵묵히 들어주고, 밖으로 소문도 내지 않아요. 그리고 제가 사랑을 쏟은 만큼 이 아이는 제 마음과 정성을 알아줘요. 정말 정직하거든요.“
”파프리카는 목이 마르면 아래쪽 잎이 이렇게 뒤집혀요. 물을 주면 다시금 잎이 펴지고, 칼슘이나 마그네슘 등 양분이 부족하면 열매에 흔적을 남겨요. 그러면 저는 양분을 조절하고 돌봐주는 거죠. 저는 파프리카랑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인데요. 정확히 말하자면, 어쩌면 저의 일방적인 대화인지도 모르죠. 그런데 파프리카에게 속을 터놓고 나면 얼마나 마음이 편하고 좋은지 몰라요.“
”제가 파프리카와 대화하는 것을 보고 아버지는 무슨 통화를 그리 오래 하나 하셨데요. 그런데 알고 보니 파프리카에게 말하고 있는 저를 보고 이런 미친놈 하셨죠. 하하하! 그런데 지금은 그러려니 하세요. 제가 행복해하니까요.“
파프리카는 세균이나 감염에 매우 취약한 식물이다. 한 가지에서 병이 들면 순식간에 다른 가지로 번져 아예 파프리카를 뽑아 없애야 하는 경우도 있다.
”파프리카가 너무 예민해서 7년 농사를 지었는데도 저는 어려울 때가 많아요. 마치 저를 보는 것 같죠. 그래도 정성껏 돌보면 제 마음을 알아주니 그게 보람인 거죠.“
파프리카 농사는 시설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온실 건축, 유지관리비가 상당히 많이 든다. 개복치, 김승천의 하우스는 약 5,500평 규모로 평균 난방비는 연간 5천만 원가량이라고 한다. 3년 주기로 비닐을 교체해주고, 각종 감가상각과 재료비 등 큰 비용이 들지만 그래도 웬만한 기업에서 일하는 것보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상당히 월등하다고 한다. 서울에서 함께 공부했던 친구들조차도 부러워하는 춘양의 파프리카 농사에 대해 그는 이제 춘양을 떠날 일은 평생 없다고 한다.
”춘양은 제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기도 하지만 맑은 공기가 아름다운 자연환경은 대한민국 최고예요. 스트레스에 취약했던 저도 춘양에 오니 너무 건강해진 거죠. 세상의 모든 개복치들이 춘양에 와서 일하면 완전히 치유될 수 있어요. 저는 확신해요! 그래도 9월까지 하루 14시간씩 고되게 일하고 나면 10월에는 꼭 번아웃이 와서 일주일 정도는 바다에 가서 쉬어요. 웃기죠? 개복치인 제가 산골에 와서 치유되고 나면 다시 바다에 가서 쉬고 돌아온다는 게요.“
세상의 모든 개복치를 김승천은 환영한다. 특히, 일자리도 줄 수 있으니 경제도 해결하고 힐링도 원없이 할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다. 자신을 개복치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지원해봐도 좋겠다. 위치는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에 있는 유일한 파프리카 농장이다.
노지 사과밭 사이에 자리 잡은 온실에서 하늘만 바라보며 천장까지 키를 쭉 뻗어대는 파프리카처럼 그의 마음 씀씀이도 열매들도 익어만 간다. 개복치들이여! 산골 봉화군 춘양으로들 오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