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받아들이다.

by 흔들리는 민들레




태어난 김에 어쩔 수 없이 사는 걸까, 아니면 정말 살고 싶어서 사는 걸까?


엄마는 아프고 고달프게 살았다.

부모도 형제도 모두가 그녀를 힘들게 했으며 남편도 그리고 본인 자신마저도 본인을 힘들게 했다. 먹고사는 건 언제나 지긋지긋한 일이었으며 한 번도 풍족한 여유를 누려본 적 없다. 좋은 옷 한번 입어본 적도 없고 좋은 곳 구경 한번 해본 적 역시 없다.

"엄마 영화 구경가요.." 내 말에 딱 잘라 그런 건 돈 xx(돈 낭비)이라고 거부하시고 외식 또한 거부하신다. 그래도 해드리고 싶었고 해 드리려고 노력했으나 그녀는 늘 거부하셨다.

마치 본인은 절대로 행복하면 안 되는 사람인 양, 내 기억 속 그녀는 과거나 지금이나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는 사람이다.



나 역시 그녀만큼이나 사는 것이 힘들어 카세트 테잎의 stop처럼 삶을 정지시켜버리고 싶을 때가 많았다. 지금도 내가 생에 대해 애착을 가지고 있는 건가 의구심이 들 때가 많다. 다시 말해 기안 84가 한 말처럼 태.어.난. 김.에.사.는. 건지, 아니면 정.말. 살.고. 싶.어.서.사.는. 건지 모르겠다.

그녀의 나이 올해 흔 넷이다. 아무리 백세 시대라고는 하지만 서서히 드리우는 죽음의 그림자에 대해 자유로울 수가 없는지 자꾸만 두려워하신다.

몸에서 일어나는 작은 변화나 증상에도 큰 병이 있는 건 아닌지 덜컥 겁을 내시고 당장에 전화를 하신다.

만약 큰 병이라면 어쩌냐고, 치료할 때 아프면 어쩌냐고 아이처럼 두려워하신다. 그런데 정말 큰 병이라면 어째야 하는 걸까. 병원에 입원을 해서 갖은 고생을 하시고 남은 생을 그렇게 마감하셔야 하는 건가. 아니면 고통스러운 치료 대신 평화로운 죽음을 받아들이셔야 하는 건가.

70년을 살았는데 30년을 더 살고 싶어야 하는 건가, 아니면 70년으로 만족해야 하는 건가.

나는 마음속으로 엄마에게 절대 닿지 않을 질문을 했다.



'사는 게 너무너무 힘들었다며, 아빠가 너무너무 원망스럽다며, 가난이 정말 지긋지긋하다며, 지금은 여기저기 아픈 게 힘들다며. 그런데도 그런 삶을 계속 살고 싶은 거야? 그런데도 삶을 놓기 싫은 거야?

이런 삶이, 뭐가 그렇게 좋아서? '







죽음은 정말 애통하기만 한 걸까?


엄마가 사시는 집의 주인 할머니가 얼마 전 돌아가셨다는 말씀을 하시며, 참 좋으신 분이었는데 갑작스럽게 떠나셔서 너무 안타깝고 눈물이 난다고 하셨다. 그런데 죽음이 정말 그렇게 슬픈 일이기만 할까?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난다. 돌이킬 수 없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병이 나기도 한다.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죽기도 하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기도 한다. 그런데 칠십평생을 사고나 불편한 장애 없이 살아오다가 자연사했다면 또는 병사했다면 그것이 그렇게 큰 슬픔일까?

평생 고생만 하시다 연세 드셔서 병에 걸려서 돌아가셨다면 가족들의 가슴에는 슬픔이 가시기 힘들다.

그런데 그것이 인생 아닌가?

누군가는 편안하게 살다가 죽고, 누군가는 죽도록 고생만 하다가 죽는다. 그런데 모두 죽는다.

삶의 모습이 어떠했든 간에 모두가 죽는다. 그건 해가 뜨고 지는 일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다.

애도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애도는 이별에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그런데 애도의 과정에서 부모의 고생 혹은 가족의 고생에 대해 가슴 아파하며 시간을 채우는 대신, 떠나간 이와의 아름다운 추억과 행복했던 기억을 채울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한 애도는 죽음을 애통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만든다. 나 역시 과도하게 죽음을 두려워하던 때가 있었다. 내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충분히 애도하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속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엄마도 애도가 서툰 사람이라는 것을... 그래서 그녀는 그렇게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거라는 것을...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죽음이 정해진 사람들이다. 다만 그 시기만 미정일 뿐인 것이다.



작년 초, 아흔넷 시할머니가 몸이 아프셔서 병원엘 가셨다. 의사는 이미 할머니의 신장이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고 했고, 할머니는 식사를 하시지도 거동을 하시지도 못하시는 상태였다.

할머니는 요양병원으로 모셔졌고 작년 초 의사의 한두 달을 넘기기 힘들 거라는 예상을 깨고 지금까지 살아계시다. 병원에 뵈러 갈 때마다 할머니는 우신다. 병원 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시지만 할머니의 자녀분들도 모두 일흔이 넘으셨기 때문에 할머니의 수발을 들어드릴 수가 없다.

나를 보며 우시는 할머니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좋아하시는 식혜를 만들어 찾아뵈는 일뿐이다. 안타깝지만 할머니는 죽음을 받아들이셔야 한다. 더불어 나의 엄마도 앞으로 도래할 죽음을 준비하셔야 한다.

생애 수년간 인간의 죽음에 대해 연구하다 숨진 정신과 의사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죽어감을 두려워하는 것이라 했지만 둘 중 어떤 것을 두려워한다 해도 결국 그 시기는 오고야 만다. 인간의 두려움과 상관없이 온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우리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상징적으로 비유하자면 죽음은 그저
'한 집에서 더 아름다운 집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고치(몸)가 회복 불능의 상태가 되면 나비(영혼)가 태어난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사후생>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