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 사회 속에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사회가 정해놓은 규범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은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정해진 법률과 질서와 도덕적 규범을 지켜야만 한다.
교육을 받아야 하고, 부모는 아이를 잘 돌보아야 한다. 학생은 공부에 전념해야 하고 아내는 남편이 힘들게 일할 때 유모차를 밀고 카페에서 커피를 사 마시면 안 된다. 좋은 아내라면 아침을 차려주고 비싼 명품보다는 검소한 장바구니를 선호해야 하며 살림을 깔끔히 관리해야 한다. 며느리는 시부모가 시키는 일은 할 수 있는 한 되도록이면 하는 것이 집안의 분란을 일으키지 않는 현명함이며, 명절에는 시댁에 먼저 가야 한다.
부모님이건 시부모님이건 생신 때는 찾아뵙고 용돈과 함께 식사를 대접해야 하고, 부모님의 환갑이나 칠순에는 자녀가 잔치를 해 드려야 한다.
부모가 연로할 경우 자녀가 부모를 모셔야 한다.
결혼을 한 기혼자는 자신의 배우자에게 충실해야 하며 외도를 할 경우 지탄을 받아야 한다.
상간녀는 가정파괴범이며 그에 따른 사회적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동성애는 혐오를 유발한다.
여성이 출산을 한다고 해서 남성이 군대를 가야만 하는 억울함이 해소되진 않는다. 여성이 노출이 있는 옷을 입는 것은 남성을 유혹하기 위해서다. 등등등....
이러한 것들은 사회적, 도덕적 규범 속에 인간의 내면에 형성되어버린 고정관념들이다.
이 고정관념들 중 하나라도 가지고 있지 않는 이가 있다면 아마 그는 늑대에게 길러진 늑대아이(?) 일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충조평판에 익숙하다. 자기 계발서들 안에는 총조평판이 차고도 넘친다.
자기 분야에서 최고의 성공을 이룬 이들에게 그 비법을 들으려는 방송 프로그램들이 줄을 섰으며,
부자의 비법, 성공의 비법, 좌절 극복의 비법까지
알려준다. 다이어트의 비법, 요리를 맛있게 만드는 비법 등등등..
많은 사람들은 공통된 길을 가리키기 때문에 많은 이들은 덩달아 그 길을 바라보며 그곳으로 향하려 애쓴다. 많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관념이 자신의 것이 된다. 많은 이들이 그들과 다른 이들을 바라보며 손가락질을 하면 함께 손가락질을 한다.
나는 그러한 규범과 관습들과 그에 따라오는 고정관념을 거부하고 싶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비난할 권리는 없다. 사회와 사람들이 지향하는 대중적(?)인 모습이 아니라고 해서 누군가가 누군가를 비난할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으로 큰 영향력을 미치는 공인이라고 해서 늘 선한 영향만 미치며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공인도 공인일 뿐 보통의 인간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 어떤 모습의 인간이건 인간만이 가진 내면적인 구조의 틀은 비슷하다고 본다. 그 누구도 누군가를 평가하거나 비난하거나 판단할 권리는 없다. 사람은 누구나 존귀하며 있는 그대로 존중받아야 한다.
쉽지 않은 이상적일 수 있는 말이라는 것을 알지만
나는 그것을 추구한다.
< 왜?라는 질문 >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들에
왜? 왜, 그래야 하지?라는 질문을 던지다 보면
동의할 수 있는 관념들도 있고 동의할 수 없는 관념들도 있다. 내가 어떤 관념에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동의한다면 어떤 이유에서 동의하고 동의하지 않는다면 어떤 이유에서 동의하지 않는지를 알고 있다면 조금쯤은 관념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누군가를 비난하는 것은 각자가 가진 개별성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살인을 저지르거나 법률을 지키지 않아 남에게 되돌릴 수 없는 피해를 저질렀다면 처벌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그것이 아닌 일반적인 모습이 아니라고 해서 비난하거나 판단하는 실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그것은 그 사람의 생이며 그 생의 주인공은 그 사람이다. 우리는 남의 인생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된다.
동성애를 왜 혐오하는가? 그들의 선택이다.
타인의 불륜을 왜 비난하는가? 그들의 인생이다.
비난해야 할 것은 그 혼인관계에서 신뢰를 저버린 남편이다. 그를 비난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은 타인들이 아니라 그의 아내뿐이다. 왜 남편의 상간녀에게 달려가 머리채를 휘어잡는가? 권리를 가진 것은 남편에 대해서만이다. 본인이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다른 여성에게 그럴 권리가 생기는 것인가?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여성들을 왜 비난하는가?
그들은 목소리를 낼 권리가 있다. 그럼 여성들도 군대에 가라고 한다. 남성들을 군대에 보낸 것은 누구인가?
자녀가 왜 부모의 칠순, 팔순 잔치를 해주어야 하는가? 낳아주고 길러주었기 때문에? 자녀는 왜 탄생했는가? 부모의 필요로 탄생시킨 것이 아닌가? 자녀는 부모 유전자의 전달자이다. 건강하게 잘 커줬다면 그것으로 잘된 일이다. 자녀에게 그동안 잘 키워줬기 때문에 그런 대접을 받기를 바라는가? 부모의 양육이 자녀의 빚인가?
남이 유모차를 끌고 커피를 사 마시던 콜라를 사 마시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왜 비난을 한단 말인가? 알코올 중독에 빠지고, 길에서 노숙을 하는 이들을 보며 왜 찌푸리는가? 그것은 그들이 선택한 그들만의 삶이다. 좋은 아내의 조건이 왜 아침밥을 차려주느냐 마느냐인가? 왜 그녀는 명품을 사랑하면 안 되고 집을 깨끗이 치워야 하는가? 그녀는 하나의 취향과 욕구를 가진 개인이어서는 안 되는 것인가? 기능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은 기계이지 인간이 아니다. 아내를 기계로 대체하고 싶은 것인가?
거참, 인생 까칠하게 사네 피곤하게.
이 글을 읽는 누군가는 아마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이다.
철학의 핵심 질문은 " 너는 누구냐?"이다.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선 사회화 과정을 통해 자신의 내부에 받아들여진 관념들에 대해 동의할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 내부로부터 나온 진정한 관념인지 아닌지에 대한 정의가 있어야 한다.
그러한 과정들을 통해 자기만의 세계관이 형성되는 것이다. 자신만의 고유한 세계관이 형성되면 그 세계관의 개별성을 있는 그대로 존중받고 싶은 욕구가 생성되므로 타인의 개별성 또한 존중하게 된다.
타인의 세계관을 존중할 때 자기의 세계관에 대한 존중도 요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 인간은 자기 삶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인간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다.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체로 살아갈지 개체로 살아갈지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당신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