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로는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그런데 왜 자꾸만 가슴이 여위는 거지. "
<한강 채식주의자 中>
나의 존재가 어떤 존재에게는 폭력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살아남기 위해 땅에서 자라나는 채소를 뽑고, 살아있는 동물을 죽이고 그 살과 가죽을 분리해서 먹고 입는 일부터 시작해 몸을 씻기 위해 쓰는 제품들, 화장품, 옷을 세탁하기 위해 쓰는 세제, 어딘가를 가기 위해 타는 자동차, 생각 없이 내뱉은 말들, 내 존재가 생성해 내는 모든 행위들과 언어들과 나의 존재 자체가 누군가에게 미치는 영향들은 누군가에게 폭력이 된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 어떤 존재는 반드시 손상을 입거나 파괴된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무게는 바로 거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존재의 불가피한 폭력성. 그 본질의 무게를 감당하기 힘이 들어 누군가는 누군가를 죽이고 자기 자신마저도 죽이는 것이 아닐까.
어떤 대상을 죽이고 싶을 때가 있다. 천천히 그리고 무척 고통스럽게. 이것은 내가 가진 원초적인 공격성이다. 내가 고통스럽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서 그 대상을 죽이고 싶은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살아남기 위한 행위는 어느 누군가에는 폭력이 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타자에게 폭력을 휘두를 수밖에 없는 슬픈 운명을 타고난 존재다.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인간에게는 동물에게는 없는 숭고한 사랑이나 희생정신이 있지 않느냐고, 부지불식간에 위기의 상황에서 벌어지는 타인에 대한 희생정신은 어떻게 설명하겠느냐고, 수많은 사건 사고 현장에서 벌어지는 기적 같은 일들은 어떻게 설명하겠느냐고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많은 인간들을 죽였고 고통에 빠지게 했다. 많은 자연과 동물들을 죽였다. 인간의 삶은 누군가의 죽음으로 지금도 존속되고 있다.
내 존재의 필연적인 공격성 때문에 살아가는 일이 버거울 때가 있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때가 있고, 분노를 억압하느라 잠을 이루지 못할 때도 있다. 그들은 생존하기 위해 공격성을 드러냈을 것이고, 나는 나의 생존을 위해 공격성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공격성을 억압하려는 내게 타인에 대한 공격성은 감당하기 힘든 감정이고 나는 그러한 무게에 쉽게 소진되어버리고 만다. 앞으로의 내 삶이 어떻게 펼쳐질지 알 수 없지만 이 삶이 버겁고 무겁다. 세상은 다채롭지만 나는 외로움이라는 단일한 감정만을 느끼며 그곳에 고립되어 있을 뿐이다.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자유롭고 무한한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외롭고 비통한 곳이다.
내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생존하기 위해 풀과 나무를 베지 않았을 테고, 생존하기 위해 부모를 곤란하게 하지 않았을 테고, 생존하기 위해 마주친 모든 존재에게 폭력을 휘두르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인간으로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세상으로부터 유리된 느낌으로 나의 공격성을 혐오할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불가피한 공격성 앞에서 삶에 대한 환멸과 마주해야 하는 모든 순간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해야만 하는 이 지독한 운명이, 내게는 너무 가혹하게만 느껴진다.
자신에 대한 환멸로 삶을 채워간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어쩌지 못할 운명의 가혹성 앞에서 무릎을 꺾어야만 하는 일도 무척 아픈 일이다. 삶과 운명에게 생을 구걸하지 않겠다는 신념이 혹시 허울 좋은 핑계는 아닐까.
내 삶이 가혹하다는 이유로, 내 존재가 필연적인 폭력성을 지니고 있다는 이유로 생이라는 굴레를 내려놓는 일이 합리화될 수 있는 걸까.
회피하지 않고 도망가지 않겠다.
똑똑히, 당당하게 고개를 쳐들고 이 환멸스런 생을 통과하겠다.
온갖 두려움과 후회, 분노와 모멸감 따위들과 함께 하겠다. 왜 나에게만 이런 시련을 주느냐고 따지고 싶을 때는 따지기도 하겠다.
운명이 왜 너이면 안되느냐고 되묻는다면 할 말이 없겠지만 그래도 좀 살살 가자고 회유도 하겠다.
아프고 거부하고 싶지만 내가 껴안아야 할 내 생이다. 이것이 운명이라면 아픈 삶을 아프게 안으리라. 아프게 입 맞추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