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라는 서글픈 가여움

by 흔들리는 민들레








배가 바다 위를 내달렸다.

물결은 하얗게 부서지며 배를 따랐다. 저 하얀 포말처럼 바다와 하나가 될 수는 없까 생각했다.

고유하면서도 누군가와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비현실적인 욕심인 걸까..

나의 작은 아이들은 이를 알 수 없는 바다를 보고 있다.





확성기가 없어 들리지도, 가로등이 없어 보이지도 않는 먹물 같은 곳에서 아이들이 죽었다.

스무 살도 안된 아이들을 수장시키고 부모들은 그날 이후 다시는 바다를 찾지 않았으리라. 아니, 빛나는 호수, 잔잔한 강, 토닥이며 위로를 건네는 빗물마저도 쳐다보지 않았으리라.

삶이 얼마나 지옥일까, 얼마나 그리울까, 얼마나 죄책감에 시달릴까, 얼마나 화가 날까, 얼마나 더 안지 못했음을 후회할까..

사람들이 거친 바위에 올라 그들의 행복한 순간을 기하고 있다.

저들의 그날과 그들의 그날은 얼마나 다를까..

포말을 바라보며 배 위에 서있는 나의 날과 그들의 날은 얼마나 다른 걸까..





바닷바람에 눈물방울이 날아가 버다.

누군가의 숨 쉴 수 없는 슬픔과 고통 앞에서도 결국에 나는, 행복하기 위해 바다를 찾았다. 그들의 슬픔도 결국에는 온전한 내 것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나의 눈물이 가식으로 느껴졌다.

왜, 삶은 기쁘기만 할 수 없는가. 왜 인간의 삶은 이토록 고통스럽고 서글픈 것일까. 왜 삶은 이토록 잔인한가..

그날의 망연함과 세월의 망연함 앞에서 전해지는 저릿한 슬픔과 분노들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심장근처 어딘가에서 부유을 느낀다.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가진다고 한들 그들과 무엇이 다른가, 결국에는 나도 그들과 다를 바 없 것이다.





바라봤고, 한 명이라도 더 구조되기를 바랐으며, 직무유기를 한 모든 이들이 처벌되기를 바랐으며, 단식하는 이들 앞에서 피자를 먹던 이들이 자신들의 무례함을 깨닫길 바랐으며, 수습되는 시신을 가리켜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이름을 붙이는 이들이 뉘우치기를 바랐으며, 아이들의 죽음마저도 정치화시키는 그들이 정말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그렇지만 바란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졌을까. 하나도,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자동세차를 하다가도, 김서린 욕실의 유리를 닦다가도, 큰아이가 처음 교복을 맞췄을 때도, 중고생들이 삼삼오오 짝을 이뤄 벚꽃나무 아래를 걷는 것을 볼 때도 바랐다. 인간의 조건에 대해서 그들이 제발 깨닫기를. 그러나 그전에, 나는 무엇을 했는가. 바라는 일 말고 무엇을 했는. 침몰하는 배를 바라보기만 했던 그들과 나는 무엇이 얼마나 다를까.










한 인간 안에는 무수한 면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양한 사회적인 과정을 거치며 정서적인 발달을 토대로 성인이 된다. 그러나 모든 이들이 같은 정서로 성장하진 않는다. 모든 인간에게는 개발되지 않은 부분이 분명히 있다.

타인을 사랑하고 타인의 고통에 공감한다는 것은 굉장히 보편적인 가치인 것 같지만 어떤 이들에게 공감이라는 감정은 미개척 분야일 수도 있다. 바로 거기에 인간이라는 존재의 서글픔이 있다.





나빠서, 좋아서, 깨달아서, 깨닫지 못해서, 모두가 슬프다. 나는 그런 인간이란 존재가 너무 화가 나고 너무 가여워서 깊이 서글프다.

우주와 같은 다양성이 개발되지 못하고, 고유성의 날개가 꺾인 채 터덜터덜 무거운 걸음을 내딛는 존재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나를 서글프게 한다.

타인을 사랑하지도 공감하지도 못하며 오로지 자신의 생존만을 위해 타인을 수단이나 도구로 사용하는 이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나를 화나게 한다. 또한 이런 글을 쓰고 있는 나도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이라는 종에 속한다는 것이 환멸스럽고 구차하다.

분노든 환멸이든, 가여움이든 서글픔이든 하나만 하면 좋을 텐데, 존재의 양면성은 이토록 무겁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