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가혹해지고 싶을 때

by 흔들리는 민들레







아이가 기거나 걸어 다닐 때는 잠시도 눈을 뗄 수 없다.

싱크대 문을 열어 간장을 쏟아놓기도 하고, 물티슈를 모조리 뽑아놓기도, 서랍장 안의 물건들을 다 쏟아놓기도 한다.

물도 쏟고 밥도 쏟고 과자도 쏟고 과일도 쏟는다.

잠시만 한눈을 팔아도 아수라장이 된다.

빨래를 개어서 쌓아놓으면 기어 와서 허물어버리고 제 머리에 뒤집어쓰곤 꼬막손으로 박수를 친다.

나는 아이가 뒤집어쓴 빨래를 벗겨 다시 개고, 아이는 또 그걸 다시 허물어버리는 무한궤도를 반복한다.

아이는 빨래를 허물다가 내게로 기어와 당당히 내 무릎에 올라앉는데 그쯤 되면 빨래를 개는 일은 글렀고, 괘씸한 장난꾸러기의 볼록 나온 배에 입방구로 응징을 불어넣는다.

아이의 까르르 웃음소리가 햇살처럼 부서지며 온 집안으로 퍼져나가면 나의 세포 하나하나에 작은 이슬과 싱그러움이 돋아나는 것만 같다.





아이가 아이였던 시절과 점점 멀어지듯, 한가닥의 흰머리로 내 어린 시절과의 멀어짐이 실감될 때면 어쩐지 누군가에게 그 시절을 강탈당한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누가 훔쳐간 것도 아니고 기억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님에도 마치 늘 그 자리에 있었던 자주 쓰던 물건이 어느 날 갑자기 감쪽같이 사라져 버려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듯한 상실감이 밀려온다.

내 안의 아이는 상실된 것일까?








때때로 가슴속 아이의 존재가 느껴질 때가 있다.

가령,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을 많이 먹으면 배가 아플 거라고 얘기해줄 때나, 게임을 너무 많이 하면 눈이 나빠지니 조금만 해야 된다고 얘기해줘야 할 때, 혹은 학원에 가야 할 시간이니 친구와 이만 헤어져야 한다고 얘기해줄 때, 하기 싫은 일이 많지만 하고 싶은 일만 할 수 없다는 게 인생이란 걸 이야기해줘야 할 때, 그럴 때 내 가슴속의 아이는 아이스크림을 많이 먹고 싶다고, 친구랑 헤어지지 않고 실컷 놀고 싶다고 학원 가기 싫다고,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고 싶다고 투덜거린다.

내가 낳은 아이들과 내 안의 아이는 같은 말을 한다.





존재하기에 감당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에서 놓여나고 싶고, 자유의 달콤함만을 취하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헤매는 공통된 운명을 타고난 아이들과 내 가슴 안의 아이.

가슴속 아이는 세월에게 강탈당한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외면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잠시만 한눈을 팔아도 기어이 마음속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버리고야 마는 아이를 진정으로 사랑하기 힘들었던 것은 아닐까.




아이들이 미성숙하고 약하다고 해서 비난하고 외면하지 않는 것처럼 자신에게 넘어져도 괜찮다고, 실수하고 부딪혀도 괜찮다고, 두려워해도 괜찮다고 말해주었는가?

화가 나거나 슬플 때 화날 수도, 슬플 수도 있는 거라고 괜찮다고 말해주었는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었는가?

나 자신에게 이성적인 잣대만을 들이대고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비난해오지는 않았을까?

나는 세상의 이방인이 아니라 나 자신의 이방인이 아니었을지, 나를 억압하는 것은 어쩌면 타인이나 세상이 아니라 나 자신이 아니었을지 싸리눈 얇게 쌓인 나뭇가지들을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물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