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야 할 이유를 아직도 찾지 못했다.
이십여 년간 그 이유를 찾고 또 찾았다.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누구도 그에 대한 해답을 들려주지 않았다.
험준한 길이었다. 바람이 불고 눈이 오는데도 따듯한 옷 한 벌 없이 덜덜 떨며 걸었다. 발에서 피가 나고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것 같을 때도 쉴 수가 없었다. 쉴 곳도 없었고 손을 내밀어주는 이도 없었다. 치열했고 고통스러웠다.
아직까지도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 어딘가에서는 자꾸만 모든 걸 놓으라고 회유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목소리에 저항하면서 이 고통스러운 삶의 의미를 찾는 과정이 지난하고 외롭다.
나를 사랑한다는 이들이 내게 원하는 건 내가 되지 않는 일이다. 그들은 나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들이 말하는 사랑이 과연 사랑일까?
난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아무리 외쳐대도 전혀 듣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해도 그들이 원하는 바를 잔뜩 안긴다.
너에게 필요한 것은 이것이라는 이유를 든다.
내 사랑은 왜 늘 이렇게 아프기만 한 건지, 왜 나는 내가 될 수 없는 것인지, 나에게 어떤 문제가 있어서 그러는 것인지 공부를 하고 또 해도 이유를 알 수 없다.
사랑과 애정에 대한 욕구가 내면에 차오를 때 나 자신이 부적절한 느낌이 든다. 그런 마음에 모멸감을 주고 난도질을 해대고 싶은 감정으로 인해 괴로워진다.
그딴 건 없다고 아직도 깨닫지 못했느냐고 대체 언제쯤 그 머저리 같은 소리를 집어치울 거냐고 소리치고 싶어 진다. 그런데도 사랑에 대한 욕구는 고개를 쳐들고 여전히 슬픈 얼굴을 하고 나를 바라본다.
나를 사랑한다며 내 곁에 있는 이들은 내 사랑을 외면하고 그들 사랑의 방식을 강요한다. 시시때때로 그들에 대한 분노가 가슴속을 치고 올라와 괴롭다. 그들에게 나의 에너지를 낭비하며 분노를 던진다고 한들 변할 것이 무엇일까. 차라리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싶다.
이해 따위를 결코 하고 싶지 않음에도 그들을 향한 분노의 이면에 이해라는 것이 있음을 느낀다.
그들 내면에 자리 잡은 결핍의 감정이 나와는 무관한 것이라면, 이렇게 괴롭지 않을 것이다.
사랑과 애정에 대한 갈망과 불신, 버려지는 것에 대한 불안과 외로움들, 영원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질 수밖에 없는 근원적인 고독과 슬픔들... 그들이 가진 그러한 슬픔들은 내 안에도 존재하는 감정이다.
파울로 코엘뇨는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에서 미쳤다는 것의 기준이 무엇인가, 어떤 것이 미친것이고 어떤 것이 미친것이 아닌가, 그 기준을 정하는 것은 누구인가 물었다.
인간의 감정은 내가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병적이든 아니든 모든 부분이 내 것과 닮아있기에 그 감정을 마주할 때는 언제나 가슴이 아프다. 자신들이 아프다는 것을 알지도 못한 채 괴로워하는 이들을 보면 마치 죽음을 앞둔 어린아이가 집으로의 회귀를 맹목적으로 믿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만 같다.
나도 지금의 내가 되기를 원한적이 없고 그들도 역시 지금의 그들이 되기를 원한적이 없지만 결국 자신의 존재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에게 있다.
원한적 없던 삶을 부여받고 그 책임을 짊어져야만 하는 인간의 생이 가엾고 애처로울지라도 누구도 자기의 생을 대신 책임져주지 않는다.
그게 삶이고, 그러한 삶을 살아냈기에 망자가 된 이는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망자는 가엾지 않고 슬프지도 않다. 다만 그리울 뿐이다. 그러므로 계단이나 사다리를 밟지 말고,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인간은 왜 생을 이어가야 하는 걸까..
원한적 없던 삶에 대한 의무로?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서? 더 많은 희로애락을 경험하기 위해?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행위는 생에 대한 실패와도 같으므로? 이미 너무 많이 살아버려서?
인간은 왜 살아야 하는가?
당신은 왜, 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