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나는 누구였을까... 사십여 년을 살아오면서도 내가 누군지를 몰랐다. 나는 누구일까.. 나는 누구일까... 누군가가 씹던 껌이 신발 밑창에 들러붙어 결코 떨어지지 않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신발을 버릴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학교를 가고, 졸업을 하고, 돈을 벌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에게 상처받고,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누군가를 떠나오던 그 사람은 과연 누구였을까?
우울증을 통과하며 나는 비로소 나의 전 생애를 관통하고 있었던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학교를 가고, 졸업을 하고, 돈을 벌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에게 상처받고,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누군가를 떠나오던 그 사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신발 밑창에 붙이고서 늘 이리저리 뛰어다녔던 그 사람... 그 사람은 아무도 아니었다. 누구도 아니었고 무엇도 아니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도태되지 않기 위해 버둥거리던 생명체. 딱 거기였다.
너는 누가 될 것인가
너는 누가 될 것인가?
철학에서 던지는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어쩌면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이에게 던지는 함정인지도 모른다. 그 질문은 <너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너는 누가 될 것인가>라는 질문의 비틀림인지도 모른다. 나는 결코 떨어지지 않던 그 질문을 나만의 방식으로 해석했고 그랬으므로 나만의 목적을 설정할 수 있었다.
어떤 직업을 갖겠다는 것은 목표다. 글을 쓰겠다는 것도 목표다. 또 공부를 해서 어떤 성적을 받겠다는 것도 목표다. 몸무게를 얼마큼 줄이겠다는 것도 목표다. 부자가 되겠다는 것도 목표이고 어떤 집을 어디에 사겠다는 것도 목표이다. 어떤 곳으로 여행을 떠나겠다는 것도 목표다. 세상에는 천 가지 만 가지의 목표들이 마구 날아다니지만 언제나 목적은 목표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우울증이란 사막 한가운데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누가 되고 싶은가>를 생각했다. 누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했다. <어떻게>라는 고민으로 <목표>들을 건설했고, <목표>라는 건축물들 사이를 배회하며 <목적>을 정할 수 있었다. 그 모든 과정들이 헤매임과 서성임, 망설임, 슬픔, 분노, 두려움들에서 나왔다. 기쁨, 행복, 희망 같은 건설적인 감정들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여하튼 그랬다.
목적지를 정하고 떠나는 길.
내 삶의 목적은 부유함이나 편안함이 아니다.
누군가의 인정이나 기준에 맞추는 것도 아니다.
지난 일들을 다 잊고 나마스떼 하며 모든 번뇌를 놓아버리는 것도 아니다. 종교인이 되는 것도, 작가가 되는 것도, 누군가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는 것도 아니다. 매 순간 <성장>하는 것 그것이 내 삶의 목적이다.
삶의 목적을 정하고 나니 고통과 괴로움들이 견딜만해졌다. 의기소침해지고 우울했던 날들이 지나가버렸다. 목적지를 알고 가는 길이었기 때문에 괜찮았다. 어딘지도 모르고 길을 잃은 것 같아 불안했던 날들이 목적지를 알게 되니 여유롭고 차분해졌다. 넘어져 울다가도 문득, 아, 이건 내 목적이 아니지, 깜빡했네, 라며 일어나서 바지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낼 수 있게 되었다.
목적이 부재한 목표는 언제든 붕괴되어 버릴 빈약한 집이었고 나는 무수한 집들을 붕괴시켜 버리고 나서야 그것을 깨달았다. 무언가를 만들어내려면 무수한 상실을 겪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옹기장인이 무수한 부서짐을 마주해야 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