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한 운동화가 없어서 최근에 새 운동화를 하나 샀다. 외출할 일이 생기면 나도 모르게 그 운동화를 신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단화도 있고 구두도 있는데, 다른 신발은 신을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마치 내 발에 의지가 있는 것처럼 그 운동화만을 찾는다. 아주 잘 사용하고 있다.
그 운동화를 신고 자주 가는 도서관에 상호대차 도서를 찾으러 간다. 내가 읽고 싶었던 책이 다른 도서관에서 우리 동네 도서관에 도착했다는 알림을 받았기 때문이다. 예쁜 책이, 한 인간의 아름다운 영혼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사용’과 ‘이용’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이용’에는 ‘사용’보다 더 명확한 목적성이 있다. 특히 그 대상이 기관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그 목적성은 더욱 강화된다.
‘사용’이든 ‘이용’이든 우리는 이 단어들을 사람에게도 쓸 수 있다. 그러나 잘 쓰지는 않는다. 사람을 도구로 대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다. 하지만 사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자원이기도 하다. 그것이 지지 자원이든, 방해 자원이든 말이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사용되기도 하고, 누군가를 사용하기도 하면서 살아간다.
운동화를 사용해 가고 싶은 곳으로 가거나, 책을 빌리기 위해 도서관을 이용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적절해 보인다. 여가 시간을 사용해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친구라는 자원을 활용하는 것이니 적절하다. 그러나 여기서 만약 내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만 친구를 ‘이용’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용’과 ‘이용’의 차이는 목적성에 있다. 만약 사람에게 ‘사용’이라는 단어를 적용한다면 그 안에는 목적의 적절성이 포함된다. 그러나 사람을 ‘이용’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자기 목적의 과도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전자는 숨어 있는 목적성이고, 후자는 드러나는 목적성이다.
숨어 있는 것과 드러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타인에 대한 ‘고려’다. 고려는 타인에 대한 인식이 있을 때 가능하다. 타인에 대한 인식이 없으면, 즉 고려하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이용’하게 된다. 타인에 대한 인식을 가지려면 먼저 자기 인식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자기 인식이 없다면 타인에 대한 인식도 있을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자기 이익을 위해 타인을 이용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지고, 자책감이나 죄책감도 사라진다.
나는 악의적인 어른들 사이에서 자랐다. 그리고 그들이 서로를 이용하는 모습을 매일 보았다. 그들은 내가 엄마를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제는 안다. 그 말은 형편이 어려운 자매, 누나, 여동생을 돕고 싶지 않았던 자신들의 필요를 위해 나를 이용했던 것임을. 그들은 그녀를 돕지 않았지만, 나는 그녀를 도왔다.
나는 존재의 ‘사용’을 상실했다. 대신 ‘이용’당함으로써 인간의 본질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나 역시 ‘착한 딸’이라는 라벨을 ‘이용’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그들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다른 선택을 통해 그들과 달라질 수 있음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