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라는 끈적한 폭력
내가 ‘나쁜 딸’이 되기로 결심하고 엄마의 요구에 선을 긋기 시작하자, 그녀는 영리하게도 전략을 수정했다. 정면 돌파가 불가능해진 그녀의 화살은 이제 내 곁의 가장 가까운 존재, 남편이라는 ‘우회로’를 향했다. 내가 거절한 무리한 요구들, 내가 피 흘리며 사수한 경계선들이 ‘사위’라는 통로를 통해 교묘하게 내 안방으로 다시 침투하기 시작했다.
남편은 소위 ‘법 없이도 살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평판 뒤에는 갈등을 혐오하고 직면을 회피하는 평화주의가 숨어 있었다. 엄마는 그의 그 약한 고리를 정확히 파고들었다. 그녀는 내게 거절당한 서운함을 남편에게 쏟아내며 ‘가련한 장모’가 되었고, 남편은 그 지독한 가여움에 속수무책으로 포섭되었다. 그는 내게 타협을 권했다. “그냥 해드려. 네가 안 하니까 장모님이 속상해하시잖아. 겉으로만 해주는 척하는 게 그렇게 어렵니?”
남편이 내세운 ‘평화’는 사실 평화가 아니라 ‘침묵하는 질서’였다. 시스템은 언제나 소란을 피우는 자를 문제아로 규정하고, 그 소란의 원인을 제공한 가해자에게는 관대하다. 남편은 나를 달래는 척하며 사실은 시스템의 안녕을 위해 나의 희생을 종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웬이 말한 ‘삼각관계(Triangulation)’의 가장 잔인한 형태가 내 거실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두 사람이 결탁하여 한 사람을 ‘정서적 국외자’로 만드는 이 구조 속에서, 나는 내 집안의 주인이 아니라 불청객으로 전락했다. 관계의 융합이 어떻게 한 인간의 영토를 침범하고 자존감을 도려내는지, 나는 그 끈적한 현장의 목격자이자 희생자였다. 관계의 끈적함은 결코 명쾌한 계산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한 번의 양보는 내 가정의 문고리를 그녀에게 다시 넘겨주는 일이었고, 내가 세운 주체성의 탑을 스스로 허무는 일이었다.
남편은 내 편인 척했지만, 사실 장모의 가장 충실한 대변인이자 부역자였다. 그는 엄마의 요구를 들어주며 ‘착한 사위’라는 도덕적 우월감의 의자에 앉았고, 그 요구를 막아선 나를 ‘집안의 평화를 깨는 모난 아내’로 몰아세웠다. “너만 가만히 있으면 아무 문제없는데, 왜 자꾸 일을 만들어?” 그 말은 엄마라는 슬라임으로부터 내 존재를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이던 나를 뒤에서 찌르는 비수였다.
방관은 중립이 아니다. 갈등을 회피하기 위해 가해자의 논리를 피해자에게 설득하는 행위는 자기 보호적인 공조일 뿐이다. 나를 지우는 것은 거대한 악의가 아니라, 평범한 이들이 보여주는 비겁한 공조라는 사실을 나는 뼈아프게 배웠다.
더 이상 물러설 영토가 없었다. 이 끈적한 관계의 덫 속에서 내가 소멸될지도 모른다는 서늘한 공포가 발목을 타고 올라왔다.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 세상에서, 나는 생존을 위해 펜을 들었다. 그것이 내 첫 책 《산다는 것은 흔들리는 일이다》의 시작이었으며, 남편의 마음속 깊은 구덩이를 응시하게 될 긴 여정의 출발점이었다.
내가 마주한 거실의 삼각관계는 사회가 개별성을 말살하는 전형적인 수법의 축소판이었다. 시스템은 언제나 표면적인 평온을 유지하기 위해 가장 다루기 쉬운 이에게 희생을 강요한다. 남편이 수호하려던 ‘평화’는 사실 정의로운 화합이 아니라, 시스템의 부품 하나(나)를 깎아내어 전체의 톱니바퀴를 억지로 돌리려는 구조적 태만에 불과했다. 타인의 선함(착한 사위)이 어떻게 피해자의 고립을 완성하는 무기가 되는지 목격하며, 나는 비로소 ‘우리’라는 이름의 반죽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깨달았다.
나는 더 이상 시스템이 부여한 ‘모난 아내’라는 배역에 갇혀 있지 않기로 했다. 사적인 비명을 공적인 기록(글쓰기)으로 옮기는 행위는, 나를 지우려던 그 끈적한 연대 밖으로 던지는 최초의 신분증이었다. 관계의 덫 속에서 소멸되어 가던 자아를 건져 올리는 이 작업은, 내가 도달하게 될 ‘진정한 자립의 풍경’을 향한 고독하지만 존엄한 첫걸음이었다. 나를 지탱해주어야 할 울타리가 나를 옥죄는 창살이 되었을 때, 유일한 구원은 그 시스템의 문법을 거부하고 나만의 언어를 창조하는 것뿐이었다.
삼각관계(Triangulation)
가족치료의 거장 머레이 보웬(Murray Bowen)이 제시한 핵심 개념으로, 두 사람 사이의 불안이나 갈등이 높아질 때, 그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제3자를 끌어들여 관계의 구조를 만드는 현상이다. 친정엄마는 나와의 직접적인 갈등에서 오는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사위를 끌어들였고, 남편은 그 삼각관계 안에서 '착한 사위'라는 역할을 맡음으로써 나를 고립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