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라는 끈적한 폭력
남편에게는 깊고 어두운 마음의 구덩이가 있었다. 그 구덩이의 이름은 '가여운 내 어머니'였다. 그의 아버지는 지독하리만큼 가부장적이었다. 어머니를 곁에 두고도 네 명의 여동생들만을 챙기며 군림했고, 어머니의 목소리에는 단 한 번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타협 없는 아버지의 그늘 아래서 시어머니는 서서히 말라갔다. "나는 아무것도 못 해..." 입버릇처럼 무력감을 내뱉던 어머니는 깊은 우울의 늪에서 늘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죽고 싶다는 하소연을 쏟아냈다.
남편은 그런 어머니를 보며 자랐다. 아버지를 증오했고, 고립된 어머니를 구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력함에 진저리를 쳤다. 남편의 마음 깊은 곳에는 '다시는 가여운 여자를 외롭게 두지 않겠다'는, 슬프고도 강박적인 부채감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런 남편의 눈에 장모는 어떻게 비쳤을까. 그녀가 던지는 무리한 요구들, 그 끈적한 의존의 손길을 마주했을 때 남편은 장모에게서 자신의 어머니를 보았다. 홀로 남겨져 흐느끼던, 누군가의 도움이 간절했던 그 가여운 여인의 잔상을 발견한 것이다.
비극은 거기서 시작되었다. 내가 내 삶을 지키기 위해 엄마의 요구를 거절할 때마다, 남편은 나를 '아내'로 보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서 '어머니를 무시하던 아버지의 환영'을 보았다. 내가 내지른 비명은 그에게 아버지의 폭언처럼 들렸고, 내가 그은 단호한 선은 어머니를 벼랑 끝으로 밀어 넣던 아버지의 냉혹함으로 치환되었다.
남편은 나를 공격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내 뒤에 겹쳐진 자신의 아버지를 공격하고 있었다. 나를 '나쁜 사람'이라 비난하며 엄마의 편을 들 때, 그는 비로소 어린 시절 구하지 못했던 자기 어머니를 이제야 구하고 있다는 무의식적 보상감을 느꼈을 것이다. 내 고통은 그의 안중에도 없었다. 그에게 이 싸움은 현재의 고통이 아니라,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처절하고도 번지수가 틀린 복수극이었으니까.
우리는 각자의 지옥에서 싸우고 있었다. 나는 엄마라는 덫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고, 남편은 그 덫을 빠져나오려는 나를 보며 자신의 아버지를 증오했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왜 내 가장 가까운 사람이 나의 적이 되어 나를 덫 속으로 더 깊이 밀어 넣었는지. 오랜 시간 심리학의 숲을 헤매며 인간의 무의식을 파헤치고 나서야 깨달았다. 우리를 묶고 있던 밧줄은 단 한 줄이 아니었다는 것을.
부부라는 이름으로 맺어진 관계가 사실은 각자의 유년기가 부딪히는 거대한 사고 현장이었던 셈이다. 남편 역시 자신의 유년기가 파놓은 구덩이 속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나를 짓누르던 그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응시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남편의 구덩이는 그 개인의 결함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오랜 시간 묵인해 온 ‘상처의 대물림’이라는 거대 담론의 파편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도 모르게 시스템이 파놓은 무의식의 구덩이를 하나씩 품고 살아간다. 가부장제의 폭력성을 목격하며 자란 세대가 그 폭력을 증오하면서도, 역설적으로 그 폭력을 막기 위해 또 다른 피해자(아내)를 희생시키는 이 기괴한 연쇄 고리. 이것이야말로 내가 말하는 ‘슬라임 사회’의 가장 내밀하고도 잔인한 작동 원리다.
우리는 가족이라는 명목으로 타인의 영토를 침범하고, 그것을 ‘사랑’이나 ‘가족애’라는 끈적한 이름으로 포장한다. 남편이 나를 향해 쏘아 올린 비난의 화살이 실은 과거의 유령을 향한 것이었듯, 우리 사회의 수많은 갈등 또한 번지수가 틀린 복수극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나를 짓누르던 그 유령의 실체를 대면하고 나서야 나는 깨달았다. 진정한 자립이란 단순히 물리적인 독립이 아니라, 내 삶을 침범하는 타인의 과거와 그들이 강요하는 배역으로부터 나의 현재를 단호히 분리해 내는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1. 전이 (Transference)와 역전이
정신분석학의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강력한 개념, 과거의 중요한 인물(남편에게는 아버지)에게 가졌던 감정이나 태도를 현재의 인물(아내)에게 옮겨와서 느끼는 현상이다.
내가 단호하게 선을 그을 때, 남편은 눈앞의 아내를 보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어머니를 핍박하던 '아버지의 잔상'을 내게 투사(전이) 한 것이다. 그에게 나는 아내가 아니라 공격해야 할 '가해자 아버지'였던 셈.
2. 반복 강박 (Repetition Compulsion)
프로이트가 제시한 개념, 과거의 해결되지 않은 고통스러운 상황을 무의식적으로 현재에 다시 재현하여, 이번에야말로 그 상황을 극복하거나 해결해 보려는 강한 본능이다.
남편은 어린 시절 구하지 못한 어머니를 대신해, 지금 장모(가여운 여자)를 구함으로써 과거의 무력감을 보상받으려 했다. 아내를 희생시켜서라도 그 반복 강박의 고리를 끊으려 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