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소리 없는 붕괴

가족이라는 끈적한 폭력

by 흔들리는 민들레


덫 안에서 자라난 감정들



움직일수록 조여 오는 덫 안에서 내가 가졌던 마음들은 단순히 '힘들다'는 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복합적인 독소들이었다.


첫째는 '지독한 고립감'이었다.

세상천지에 내 말을 믿어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감각. 나를 가장 잘 알아야 할 남편이 나를 '공격자'로 오인하고, 나를 가장 사랑해야 할 부모가 나를 '소품'으로 쓸 때, 나의 세계는 진공 상태가 되었다. 나는 살아있으나 누구에게도 가닿지 못하는 유령이 된 기분이었다. 그 고립은 나를 점점 더 깊은 침묵 속으로 밀어 넣었다.


둘째는 '내가 나를 믿지 못하는 의심'이었다.

엄마와 남편, 가장 가까운 두 사람이 동시에 나를 '나쁜 사람', '정 없는 사람', '예민한 사람'이라고 지목하자, 어느 순간부터 나는 정말 내가 그런 사람인 건 아닌지 스스로를 검열하기 시작했다. "내가 정말 너무한 걸까?", "내가 조금만 참으면 모두가 행복할 텐데, 내가 이기적인 건가?" 나의 정당한 분노는 죄책감에 오염되었고, 내 판단력은 흐릿해졌다. 나를 지키려던 방어선이 안에서부터 녹아내리고 있었다.


셋째는 '해석되지 않는 분노'였다.

이것은 폭발하는 화가 아니라, 밑바닥에 눌어붙은 검은 타르 같은 것이었다. 엄마를 향한 가여움과 증오, 남편을 향한 기대와 배신감이 뒤섞여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덩어리가 되었다. 이 감정은 출구를 찾지 못해 결국 내 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유 없는 통증, 불면, 그리고 가슴을 짓누르는 압박감. 마음이 갈 곳을 잃자 육체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을 덮어버린 것은 지독한 '혼란'이었다.

이것은 내 삶에서 '나'라는 주어가 완전히 소멸되는 과정이었다. 무엇이 내 감정이고 무엇이 남편의 감정인지, 무엇이 엄마의 것인지, 시부모님의 고독인지, 아이들의 불안인지... 그 모든 것이 마구 혼재되어 내가 누구인지조차 기억을 못 할 지경이었다.


나라는 또렷한 감각이 파도처럼 밀려갔다가, 내 주변인들에 대한 감정들이 파도처럼 다시 밀려와 나를 뒤집어 삼켰다. 그 파도에 휩쓸리면서 숨을 쉬지 못하는 날들이 지속되었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슬픔은 정말 나의 것인가?" 질문을 던져보아도 답을 할 수 없었다. 나를 정의하던 모든 경계선이 녹아내리고 나니, 나는 그저 타인들이 쏟아부은 감정을 담아내는 커다란 통이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나는 그렇게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타인의 요구와 비난을 받아내느라 내 안의 공간은 좁아질 대로 좁아졌고, 그 안에서 '진짜 나'는 숨을 몰아쉬며 죽어가고 있었다. 이 모든 역동 속에서 내가 가졌던 마음은 결국 하나로 수렴되었다. '사라지고 싶다'는 것, 혹은 '이 끈적한 관계의 껍데기를 다 벗겨내고 아주 가벼운 존재가 되고 싶다'는 갈망이었다.



이처럼 한 개인의 세계가 소리 없이 붕괴되는 현상은, ‘시스템의 부품화’가 완성되는 마지막 단계다. 사회는 개인이 명확한 자아의 윤곽을 가지고 자신의 영토를 지키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개인이 스스로를 의심하고, 타인의 감정을 자신의 업보로 받아들이며, 끝내 ‘나’라는 주어를 포기할 때 비로소 가장 부드럽고 효율적으로 작동한다. 내가 겪은 지독한 혼란은 단순히 심리적인 질병이 아니라, 거대 시스템이 한 인간의 고유성을 지우고 ‘감정의 공용 수납함’으로 개조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실존적 비명이었다.



나를 지우고 타인의 세계를 지탱하는 부품으로 사는 일은 시스템 입장에서는 ‘평화’였겠으나, 내 입장에서는 ‘서서히 진행되는 살인’과 다름없었다. ‘사라지고 싶다’는 열망은 역설적으로, 더 이상 타인의 오물을 담는 통으로 살지 않겠다는 자아의 마지막 저항이었다. 이제 나는 이 끈적한 관계의 늪을 지나, 오직 나만의 이름으로 숨 쉴 수 있는 영토를 찾아 나서려 한다.


카렌 호나이 - 독일출신 정신분석가


1. 정서적 융합(Emotional Fusion) - 머레이 보웬(Murray Bowen)

보웬은 자아가 타인과 분리되지 못하고 엉겨 붙어 있는 상태를 가장 먼저 체계화한 학자이다. "내 감정과 타인의 감정이 뒤섞여 자아의 경계가 사라진 상태”를 머레이 보웬은 정서적 융합이라 불렀다.


2. 자기 소외 (Self-Alienation) - 카렌 호나이(Karen Horney)

정신분석학자 카렌 호나이는 카렌 호나이는 자아를 진정한 자아(real self)와 이상화된 자아(idealized self)로 나누고, 이상화된 자아에 맞춰 살수록 자기 소외가 심해진다고 보았다. 타인의 기대와 “~해야 한다”는 명령에 맞추느라 진짜 욕구와 감정에서 멀어질 때, 사람은 겉으로는 기능하지만 내적으로는 공허하고 살아 있으면서도 살아 있지 않은 듯한 감각을 경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