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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명씨 Jun 11. 2021

다정한 당신, 무죄

“주임님, 마음을 참지 마세요”

작년 겨울이었다. 켁켁거리는 잔기침이 며칠간 이어졌다. 코로나-19로 불안한 시국인지라 일찍이 이비인후과를 찾았다. 헛구역질이 날 것 같은 고통스러운 목 내시경을 찍고 나니 의사 선생님이 물었다.


"혹시 요즘 소화가 잘 안 되거나 위가 아프진 않았어요?"


이유도 모른 채 소화제를 달고 살던 며칠이었다. 왠지 모를 반가운 마음에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진단명은 역류성 인후두염. 보통 역류성 식도염만 알고 있는데, 역류한 위산이 식도가 아닌 인후두 쪽을 건드리면 이렇게 잦은 기침이 난다고 한다. 커피랑 술 마시지 마시고요. 인스턴트, 기름진 음식 많이 먹지 말고. 아, 먹고 바로 눕지 마세요. 지키기 어려운 훈계를 듣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 이참에 커피를 줄여야겠다 싶어 차 티백 여러 개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다음 날 회사. 어김없이 콜록콜록 잔기침이 나왔다. 기침에 좋다는 생강차도 달여 마셨지만 별 진전은 없었다. 문득 모니터 너머에서 사람 손이 훅 들어왔다. 그 손에는 따뜻한 배 음료가 쥐어있었다. 범인(?)은 옆자리 맞은 편에 앉은 동료 주임님. 잔기침 소리 듣고 사왔다면서 괜찮은 거냐고 안부를 물었다. 소음으로 신경 쓰이게 했다는 미안함에 죄송하다는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동료 주임님은 손을 절레절레 흔들며 그런 거 아니니까 미안해하지 말고 건강 잘 챙기라고 덧붙였다. 그 순간 그 음료만큼 따뜻한 기운이 마음에 감돌았다.

그 음료가 바로 이 음료랍니다

같은 날 퇴근길에 인스타그램 스토리로 설문을 올렸다. 과연 다정함이란 타고나는 것인가, 학습되는 것인가 물었다. 반응은 박빙이었다. 2:3, 3:3, 4:3으로 엎치락뒤치락했다. 사실 그 설문은 ‘다정함은 타고나는 것’이라 생각하고 올린 거였다. 내가 누군가를 살뜰히 챙기는 사람이 못되기에 다른 사람들의 동의에 힘입어 기질 탓을 해보려던 속셈이었다. 설문 결과는 뜻밖이었다. 9:9 동점으로 마무리된 것이다. 설문 결과와 DM으로 받은 각종 ‘다정썰’을 떠올리며 학습의 가능성을 믿고 노력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설문 결과가 실시간으로 왔다갔다해서 관전하는 재미가 있었다

그러다 다시금 어떤 장벽에 가로막혔다. 다정함이 학습된다고 해도, 그리하여 내가 아주 다정한 사람이 된다고 해도, 이걸 회사 생활에 적용하는 건 다른 차원이었다. 과연 회사 사람에게 다정해도 되는 건가. 회사 동료들 사이에 있는 어느 정도의 거리감이란 필수 불가결한 요소가 아니었나. 나 또한 적당한 거리감이 있는 사이에서 안전함을 느끼곤 했다. 그래서 웬만하면 정을 주고받지 않고 담백하게 일만 하는 사이를 지향했는데 이런 내가 갑자기 다정(多情)까지 해버리면 이건 너무나 놀라운 일인 것이다.




"주임님, 마음을 참지 마세요."

어느 날 점심으로 쌀국수를 먹던 중이었다. 평소에 무척 신뢰하던 동료 주임님이 느닷없이 마음을 참지 말란 말을 내게 건넸다. 나는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어째 그동안 쌓아온 성벽을 들킨 듯한 기분이었다. 마음을 참고 있는 걸 어떻게 아셨느냐는 내 물음에 “그냥”이라는 간결한 대답이 돌아왔다. 대화의 여운이 길어 점심시간이 끝나고 자리로 돌아와서도 그 순간을 자꾸만 곱씹었다. 어쩌면 내가 지향했던 거리감이란, 사람을 좋아하는 내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 만든 방어기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카인들리하되, 프렌들리하지 말자”는 다짐은 다정한 사람들 앞에서 자주 무너지곤 했다. 무너지면 또 다짐하고, 무너지면 또다시 다짐하면서 적당한 거리감을 찾아 나섰다. 같이 사는 가족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같은 공간에서 보내는 사람들에게 매정할 필요가 있나 고민도 했다.


사실 다정함 자체는 죄가 없다. 친밀함을 가장해서 너무 사적인 질문을 하거나, 다정함을 가장해서 충조평판(충고, 조언, 평가, 판단)을 하는 게 문제다. 상호 존중이 기반이 되어 있다면 다정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고생하는 동료를 응원하는 마음, 아픈 동료를 걱정하는 마음, 힘들어하는 동료를 가여워하는 마음, 그 모든 정겨운 마음엔 잘못이 없다. 오히려 귀하다. ‘TMI’라는 말로 많은 개인사가 축약되고 서로 그저 부품처럼 존재하는 회사에서 주변 사람의 마음을 살핀다는 건 분명, 귀한 일이다.




얼마 전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발목에 반깁스를 했다. 목발을 짚은 채 사무실로 출근했던 며칠 동안 여러 동료들의 도움과 연민에 기대 하루하루를 보냈다. 프린트한 자료를 대신 가져다준 동기, 오가는 길목에서 문을 열어준 후배, 택시 타는 데까지 짐을 대신 들어준 선배, 묵묵히 안부 인사를 건네준 사원님까지. 분에 넘치는 인복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퍼스널 스페이스를 파악하고 존중하려는 시도 또한 다정함의 범주에 있다면 다정함에 무장해제 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마음을 잘 받고 잘 갚는 기민한 사람이 되기를 꿈꿔본다. 이미 다정한 당신도, 무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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