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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디남 Sep 08. 2015

익숙한 건 아무것도...

세상에서 가장 낯선 곳

세상에서 가장 낯선 곳으로 가자.


 열네 시간이 넘는 비행 끝에 도착한 첫 여행지는 터키 중부에 위치한 카파도키아였다. 3백만 년 전 화산 폭발로 인해 두꺼운 화산재가 굳어 만들어진 암석들의 도시. 그 암석들이 오랜 시간 풍화작용과 지각변동으로 기괴한 모습의 이색적 풍경을 자랑하는 곳. 책에서 본 그 모습이 얼마나  특별할지 공항에서부터 기대가 되었다. 터키로 여행 오기 전 기대했던 '세상에서 가장 낯선 곳으로 나를 데려가겠다'는 주제와 가장 부합하는 여행지라 생각했다. 바로 그 카파도키아 공항에 첫 발을 내디뎠다.


 오랜 시간 비행으로 뻐근해진 어깨를 돌리며 대합실로 나와 짐을 기다렸다. 다른 외국인 관광객들이 한 명씩 가방을 찾아 가는데 이상하게도 내 가방은 나오지 않았다. 설마 그럴 일이 없다는 생각으로 가방이 나오는 입구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데, 당황스럽게도 컨베이어 벨트가 멈추고 더 이상의 짐이 없다는 메시지가 안내창에 떴다. 이 낯선 터키의 작은 공항에서 전 재산이 들어있는 배낭이 없어진 상황을 어떻게 다 설명할 수 있을까. 제대로 말이 통하지 않는 청소부와 경비원을 붙잡고 짧은 영어로 가방의 행방을 물었으나 본인들도 모른다는 무책임한 대답만 돌아왔다. 엄청난 당혹감과 혼란으로 심장이 요동쳤다. 그 가방 안에 갈아입을 옷과, 돌아갈 비행기 티켓, 여행경비, 충전기 등 중요한 물건이 몽땅 들어있었다. 배낭 없이 여행을 시작할 거란 생각조차 못했기에 발을 동동 굴렀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입사해서, 비슷한 고민을 나누던 여자친구 '진'과 동행한 여행이었는데, 둘 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아무런 위로의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양 옆을 둘러보니 우리 말고도 4명의 여행객이 짐을 찾지 못한 채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그들도 나와 같이 먼저 눈에 보이는 애꿎은 청소 아주머니와 경비원에게 자신의 상황을 토로하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이 이토록 간사할 수 있을까. 내 배낭이 없어짐은 바뀌지 않는 사실인데도, 이런 상황에 처한 사람이 우리 둘 뿐이 아니라 4명이 더 있다는 사실이 잠시 나를 안도하게 했다. '나 혼자 당한 건 아니야'라는 심리적 자기 위안과 '가방을 함께 잃어버린 사람들'이라는 집단에 소속됨이 주는 안도감이 뒤섞여 묘한 차분함이 찾아왔다. 잠시의 혼란 뒤 서로를 발견한 나머지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는지 자연스레 한 곳으로 모이게 되었다. 각자 있을 땐 자기 가방의 행방을 물어보는 데 그쳤던 사람들이 모여서 집단이 되자, 공항 사무실로 함께 들어가 이 불합리한 업무처리에 대한 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익숙한 집단에 지쳐, 이 낯선 곳으로 여행 온 사람들이 배낭을 찾겠다는 같은 목적으로 집단을 구성하자 그간 쌓였던 당혹감을 속사포처럼 쏟아내기 시작했다. 한국, 캐나다, 이탈리아 등 다양한 나라의 엑센트로 쏟아내는 불만에 공항 직원도 당황해서 문제를 찾기 시작했고, 이어서 곧 우리의 배낭이 이스탄불에서 환승하지 못하고 남겨져 있단 사실을 말해주었다. 그리고 각자 묶을 숙소로 돌아가 있는다면, 오늘 밤 비행기로 짐을 받아 보내주겠노라 약속했다. 미덥지 못한 일처리의 첫인상 때문에 몇 번이나 'Are you sure?'을 외쳤고, 반드시 짐을 보내주겠다는 확답을 받고서야 공항을 나설 수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낯선 땅에서의 여행이, 어떤 익숙한 물건도 없이 시작되고야 말았다. 다행히 인터넷을 통해 예약해두었던 숙소 직원이 공항 앞까지 픽업을 나와 있었고, 그와 함께 바로 숙소로 가게 되었다. 챙겨야 할 짐이 없었기에, 도착 첫날의 일정은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숙소에 풀어놓을 짐도, 정리할 옷가지도 없었기에 바로 투어에 참가했고, 마침 유명한 '그린투어'코스에 빈자리가 있어 참가하게 되었다. 그린투어는 기암괴석이 장관인 괴레메에서 출발하여 데린쿠유 지하도시, 으흘라라 계곡, 셀리메 수도원, 피죤벨리, 괴레메 파노라마로 이어지는 코스로 카파도키아의 인기 포인트를 효과적으로 둘러볼 수 있어 인기가 좋았다. 내게 익숙한 어떤 물건도 갖지 못한 채, 세상에서 가장 낯선 땅의 한 중간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의 집단에 속해 투어를 시작하는 그 마음이 얼마나 설레었는지 모른다. 


 지금 이 순간, 내게 익숙한 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필요한 것도 아무것도 없는 것 처럼 느껴졌다. 방금 전까지 짐을 찾지못함에 발 동동굴렀음에도, 기분 좋은 설렘만 가득했다. 마치 이 설렘 외에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참으로 가벼운 사람의 마음이었다. 저 멀리 깊은 계속이 보였고, 가슴은 더 뛰었다. 지금 이 순간, 익숙한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지금, 카파도키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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