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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디남 Sep 03. 2015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퇴근

나는 오늘 이스탄불로 퇴근한다

600일간 반복된 일상


 신입 은행원의 일상은 보통 8시 이전에  시작된다. 7시 40분쯤 출근해서 다른 직원들 컴퓨터 전원을 켜 놓는다. 은행 창구 아래에 위치한 본체의 버튼을 누르기 위해 허리를 열 번쯤 숙이고 나면 등줄기에서 땀이 흐른다.  그리고 출입문 밑에 던져져 있는 신문을 챙겨 지점장님 실에 즐겨보시는 순서대로 정렬해 놓고 창구를 한번 둘러보고 있으면 직원들이 출근하기 시작한다. 활기찬 목소리리로 인사를 하며 내 존재감을 어필한다.  보통 출납이라 부르는 금고키를 담당하는 직원이 일찍 오고, 그 뒤 한 명 씩 와서 자신의 업무 준비를 한다. 여덟 시가 조금 넘으면 출납직원이 금고에 들어가 오늘 하루 업무 할 분량의 현금 시재를 꺼내온다. 돈을 옮겨본 사람은 알겠지만, 생각보다 돈의 무게는 무겁다. 특히 시재는 종류별 동전도 포함하기 때문에 성인 남자가 두손으로 안아서 옮겨야 한다. 보통 지점에 젊은 남직원이 흔치 않기 때문에, 이 순간이면 놓치지 않고 금고로 달려가야 한다. 본업의 일이 서툰 신입행원에겐, 이 순간이 오히려 존재가치를 당당히 증명할 수 있는 순간이기도 하다. 


 지폐 다발을 꺼내고, 동전 자루를 꺼내고, 텔러(은행 창구직원) 별로 사용하는 개인 시재주머니까지 꺼내어 직원들에게 분배해주고 나면 어느덧 여덟 시 반이 되고, 부지점장님의 지시 아래 간단한 전달사항을 듣는 회의를 한다. 현재 우리 지점이 부족한 KPI 지표와, 경쟁 지점점과의 창구 친절도 모니터링 점수를 강조하며 오늘 하루도  파이팅할 것을 주문한다. 다 같이 파이팅을 외치고 자리로 돌아가 자리 정리를 하고, 8시 55분이 되면 창구로 나가 출입문 앞에 줄을 선다. 다 같이 얼굴 근육을 한번 더 풀어주고, 목소리를 점검하는  중 9시가 되고, 셔터문이 올라간다. 드르륵 소리를 내며 셔터문이 50cm도 채 올라가지 않았는데, 밖에서 기다리던 고객님이 고개를 숙여 은행 안으로 들어온다. 나는 연습한 데로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어서 오십시오 고객님, 사랑합니다 고객님'을 외친다. 그리고 문이 다 열리면, 자리로 돌아와 업무를 시작한다. 너무나 평범한 은행원의 아침 일상, 이렇게 600일이 지났다.


터키로 퇴근하기


 600일간 반복해온 일상이 오늘 저녁이면 깨어질 것이다. 귀하게 얻은 휴가인 만큼 조금의 시간이라도 아끼기 위해 금요일 밤 인천공항에서 출발하는 비행기 표를 예매했다. 효율적으로 시간을 맞춘 건 좋았는데, 너무 효율적이라 퇴근 후 집에 들를 시간도 안 나왔다. 잠시 고민하다  배낭을 메고 출근하기로 했다.  스물두 살 때 국내 무전여행을 위해 구입한 60리터짜리 배낭을 메고 평소와 같은 출근길에 나섰다. 양복을 입고 등에 배낭을 맨 내 모습이 너무나 낯설고 재밌게 느껴졌다.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은행에 들어와 탕비실 한쪽 구석에 가방을 두고 업무 준비를 했다. 가장 먼저 출근해서 배낭을 치워놓았기에 내가 어떤 모습으로 출근했는지 눈치챈 직원은 없었다.


 어떻게 하루가 흘러갔는지도 모르게 정신없는 금요일이 지나갔다. 아침 맞이  인사부터 하루 종일 업무를 하면서 머릿속엔 '오늘은 반드시 시재를 틀려선 안된다.'는  생각뿐이었다. 은행업무 특성상 아무리 저녁에 중요한 일이 있어도 업무 마감 시 시재(돈) 계산이 맞지 않으면 원인을 찾을 때 까지 누구도 퇴근할 수 없기에 실수하지 않도록 온 정신을 집중해서 일을 했다. 이론상 한 번에 모든 업무를 마감해야 인천공항 도착 시간을 맞출 수 있는 스캐쥴이었다. 은행 셔터문이 내려가고, 그날 처리했던 업무 마감을 하면서 그토록 땀 흘린 적 있었나 생각이 들 만큼 신경을 써서 마감을 했고, 한 번에 모든 계산을 맞추고 다른 직원들의 시재까지 맞는 것을 확인하고 탕비실에 숨겨뒀던 배낭을 등에 맸다. 전투적으로 계산기를 두드리던 내가 갑자기 웃으며 직원들의 마감을 돕더니, 끝나자마자 탕비실에 들어가 제 몸집 만한 배낭을 메고 나오는 모습을 보고 다들 깜짝 놀라는 모습이었다. 그대로 지점장님실에 들어가 안전히 잘 다녀오겠노라고 인사를 드리고 퇴근을 했다. 벌써 그렇게 큰 가방을 메고 있냐고 묻는 지점장님께, 오늘 퇴근지는 매우 특별해서 미리 준비했다고  말씀드렸다. 


600일간 출근했으니, 600번의 퇴근을 했을 텐데 오늘 퇴근하는 곳은 단 한 번도 가본적 없는 곳- 터키로 간다. 



나는 오늘 이스탄불로 퇴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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