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단디남 Jul 09. 2015

한 번만 주세요

이토록 원하는데

여행은 준비하면서 이미 시작

 이 세상에서 한 번도 본 적 없을 듯한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지고, 이국적 향신료가 코 끝을 스치면 무거운 배낭을 잠시 내려놓고 거리에서 케밥 하나 사먹으며 여행을 즐기는 순간을 수 없이 상상했다. 우연히 내 손에 들어온 동전 하나가 폐부 깊숙이 터키의 숨결을 불어넣은 탓에 몇 주 째 지점 사람들에게 말도 못하고 끙끙대며 터키앓이를 하고 있었다. 입사 2년 차 였지만, 단 한번도 휴가를 써본 적 없었기에 어떤 타이밍에, 어떤 말로 내 여행을 알려야 할 지도 막막했다. 뜬금없이 여름휴가를 간다는 것이 태국도, 중국도, 미국도, 일본도, 유럽도 아닌, 터키를 간다고 사람들에게 뱉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래도 그저 머릿속에 막연히 그려지는 낯선 땅의 설렘과 궁금증이 나를 간지럽혔다. 퇴근 후 터키와 관련된 책을 사모으고, 인터넷 검색을 하며 정보를 수집하는 내내 아랫배가 간질간질했다. 여행을 준비한다는 이 느낌조차 너무 좋았다. 


 터키와 관련해 쓰여진 책을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다. 지금 읽은 책 속 내용이 내 여행에 얼마나 도움이 될 지는 아직 몰랐지만, 지점 사람들에게 터키로 떠난다고 말을 뱉는 순간이 오면, 무언가 유창하게 터키에 대한 정보를 쏟아내야 할 것만 같았다. '형제의 나라라고 불리는 터키는 아시아 대륙의 서쪽 끝에 있어 유럽과 아시아의 문화가 융합되어 독특한 분위기를 풍긴다는데, 예전부터 동서양 문화의 융합에 관심이 많았다고 해야지.'정도의 물어볼 지도 의문인 질문에 대한 답변을 몇 개고 준비했다. 그냥, 갑자기 터키 여행을 가게 됐을 때 내 스스로가 준비 안된 어설픔을 보여 그 기회를 허투루 날리고 싶지 않았기에 많이도 찾아 읽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내가 먼저 휴가 얘기를 꺼내는 순간은 쉽게 오지 않았다. 무심한 척 근무하는 나날이 이어져오고 있었는데, 우연히 한 공문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거다. 바로, 이거다!'


 '터키의 대표 도시인 이스탄불에서 내년 여름(2013년)에 경주 엑스포가 열립니다. 이스탄불-경주 문화엑스포는 '길, 만남 그리고 동행'을 주제로 관광객을 맞이할 예정으로 많은 관광객이 터키를 방문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당행은 내년 여름 이스탄불을 방문할 고객을 대상으로 특판 적금상품을 개발하여 마케팅 예정에 있습니다. 본 상품 출시와 관련하여 전 직원의 많은 관심과 협조 바랍니다.' 공문에서 선명하게 읽히는 '터키'라는 단어가 한눈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심지어 창의적 조직문화 만들기의 일환으로 조직 내에서 어떤 일이든 자기가 최초로 시도해 보는 '우리가 최초'라는 타이틀의 내부 공모전이 진행 중인 상황이었다. 내게  다시없는 기회가 온 것이다. 그때 창구 저편에서 마감하며 공문을 읽은 직원들이 자연스럽게 신상품 얘기를 하는 게 들렸다.

제가 한번 다녀오겠습니다.

"어? 특이한 적금 나오네? 내년에 터키 여행 가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터키적금?"

"그러게요 대리님, 엑스포 한다더니 사람들이 터키에 많이 갈까요?"

"몰라. 터키가 흔한 여행지는 아닌데, 그래도 이런 상품이 나와야 사람들이 내년에 터키 가려고 목표도 많이 세우고, 분위기도 조성되니까 미리 출시했나 보다."

"그러게요. 그래도 이런 적금 나오니까 저도 얼른 여름휴가 가고 싶네요."


 자연스럽게 지점 사람들이 터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그 주위를 서성이며 대화를 엿듣다가 이렇게 말해버렸다.


"제가 은행원 최초로 터키에 가서 이 적금상품 홍보사진 찍어 올게요."


 한순간 뜨악하는 직원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어디서 그런 용기와 순발력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그리고는 과장님부터 설득시키기 시작했다. 어차피 우리 지점도 뭔가 '최초'사례도 찾아 시행해야 하고, 마침 터키적금도 나왔으니 제가 정말 '최초'가 될  수밖에 없는 사진을 찍어와서 직원들과 공유하면 멋지지 않겠냐고, 목에 핏대를 세우고 열변을 토했다. 예전부터 터키의 문화와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는 멘트도 빼먹지 않고 곁들이며, 어제 책에서 읽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역사에 대해 설명했다. 직원들의 눈빛이 점점 더 이상해져 갔다. '어? 이게 아닌데.'

한번만 보내 주세요. 네?

 고객이 계속 찾아오는 은행 영업점 특성 상 한 사람이 길게 자리를 비우는 것은 지양해야 할 일임은 분명했다. 시스템적으로 직원의 부재와 관계없이 움직여야 했지만, 실제 해당 영업점의 상황이나 고객의 상황에 따라 특정 '직원'이 처리해야 할 일이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지난주까지 상담했던 그 직원이랑 얘기해야 한다는 고객, 그 직원한테 일처리 하려고 왔는데 왜 이렇게 그 직원은 자리를 자꾸 비우냐며 불만을 제기하는 고객이 생기면, 옆자리 직원은 업무처리는 두배로 하면서도 괜한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래서 선배 은행원들은 긴 휴가를 쓰는데 조심스러웠을 테고, 그런 상황이 쌓이다 보니 알아서 휴가 사용에 서로 눈치를 보는 문화가 만들어졌다. 나 또한 그 상황을 잘 알고 있었고, 그 때부터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아무 문제없이 일이  처리될 수 있도록 관리고객에 대한 만기일을 조정하고, 미리 서류를 받아두는 등 처리를 하겠다고 확답을 했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지점장님의 승인이 났다. 


올 여름, 나는 세상 가장 낯선 곳에서 사진을 찍어야지. 

벌써부터, 가슴이 뛰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너는 어쩌다 여기까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