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어공주의 섹슈얼리티

기예르모 델 토로_<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by 마르코
우리가 특정한 존재에게 배타적인 가정을 붙이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 많이 폭력적인 존재가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셰이프 오브 워터>의 ‘물’이라는 공간과 ‘말을 못하는 공주’라는 설정은 우리를 ‘인어공주’의 세계로 이끈다. 처음부터 보여주었던 엘라이자 목의 상처는 마지막 장면에서 아가미처럼 변화하여 그녀가 인어공주와 같이 물에서 온 공주였음을 지지해준다. 엘라이자의 성인 ‘에스포지토’는 고아를 의미하는데, 그녀는 어려서 고아원 옆 강에서 발견되었다. 즉, 물 밖에서 벙어리로 살던 공주가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물속에서 부활하는 것은 ‘인어공주’에 대한 인용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본래 안데르센 동화 <인어공주>는 육지에 있는 왕자를 만나기위해 자신의 목소리와 다리를 교환하는 인어공주를 그린다. 물 속의 공주는 육지로 나와 목소리를 잃은 장애 여성이 된다. 이는 인어공주가 여타 다른 고전 동화 속 공주들과 다르게 사랑의 쟁취에 주체적임을 알 수 있다. 사랑을 위해 장애를 감수하면서 까지 다른 세계로의 이입을 감행한 공주가 있을까? 이렇듯 아주 오래전부터 인어공주는 본인의 욕망에 충실한 여성이었다.


그간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고유한 영역이 아니라 남성의 전유물으로 간주되어 왔다. 가부장제의 산물인 영화 또한 그 이데올로기를 반복하게 된다. 가부장제하의 섹슈얼리티 관점에서는 남성이 보는 주체가 되고 여성은 보여지는 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영화는 남성에게는 능동적 쾌락으로, 여성에게는 수동적 쾌락으로 이분화되어 수용된다. 이에 여성은 욕망을 드러낼 경우 즉시 응징 당한다. <셰이프 오브 워터> 속 백인 부부의 섹스 장면에서 절정의 순간에 남자는 여자의 입을 막는다. 이는 여성 본인의 욕망(소리)을 배제시키고 여성을 오직 남성의 배설 통로로 묘사한다. 이렇듯 제작부터 감상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남성의 시선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영화는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데올로기가 잘 드러나는 영역이 된다.

여성은 남성과 대립적인 존재로 규정되고 외면된다. 그러나 모든 여성이 여성이라는 범주 안에서 동등한 것은 아니다. 여성 안에서도 장애를 가진 여성은 더욱 멸시되며 주변부로 향하게 된다. 즉 장애라는 특수성과 여성이라는 성별을 가진 장애 여성들은 이중차별을 받게 된다. 일반적으로는 이들에게 비장애인과 똑같은 성적 욕망이 있고 그것을 실현하려는 나름대로의 노력이 있다는 것을 거의 인식하지 못한다. 즉 장애 여성은 무성(asexual)적 존재라고 생각된다. 이는 성행위를 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되고, 성욕이 없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더러 나아가 성을 원해서도 안된다는 가정이다.


<셰이프 오브 워터>에는 말을 못하는 장애 여성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에게 연약한 아이로 간주되거나 묘한 성적 대상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엘라이자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욕조에서 자위를 하며 성적 욕망을 분출하는 여자이다. 이는 엘라이자가 자신의 저주를 풀어줄 왕자의 키스를 기다리는 공주라기보다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주체적인 여성이라는 점을 강력하게 보여준다. 이는 그간 영화에서 무성(asexual)적 존재로 묘사되어온 장애 여성의 이미지를 전복시키는 일이다. 다시 말해, <셰이프 오브 워터>는 본인의 욕망에 충실한 단 한 명의 공주, 엘라이자에 의한 동화이다.


엘라이자와 대척점이 있는 인물은 백인 남성 근본주의자인 스트릭랜드이다. 그는 여주인공 목에 있는 흉터를 보면서 지배와 정복의 욕구를 드러낼 뿐만 아니라 남미에서 포획한 수중 생물을 더러운 것으로 폄하하고, 흑인 여성 젤다에게는 삼손을 배신한 딜라일라라고 모욕한다. 특히 신은 인간과 똑같이 생겼다고 근본주의적 발언을 한 스트릭랜드는 신이 흑인 여성보다 백인 남성인 자신을 더 닮았다고 주장하면서 무한한 신을 왜곡된 방식으로 한정하여 권력의 도구로 전락시킨다. 이러한 근본주의적 남성 권력은 인간과 괴물, 남성과 여성, 백인과 흑인,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등 끊임없이 무한을 유한으로 왜곡하고 환원하는 차별의 위계질서를 생산하고 그 권력을 즐긴다. 그러나 엘라이자는 스트릭랜드와 섹스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스트릭랜드에게 “지랄하지 마세요”라고 욕한다. 그녀는 백인 남성 근본주의자에게 탑승해 본인의 성적 욕망을 해소하지 않고 새로운 쪽을 공략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엘라이자와 괴생명체의 사랑은 운명이 아니다. 엘라이자는 스스로 사랑을 설계했다. 즉 운명을 만든 셈이다. 엘라이자는 괴생명체를 길들였다. 달걀을 나누어 주고 음악을 틀어주며 수화로 자신과 대화할 수 있는 언어를 가르치기까지 한다. 엘라이자의 행보는 과감해보이기까지 한다. 영화 역시 괴생명체가 엘라이자와 사랑에 빠진 이유를 정확히 설명하지 않는다. 즉 괴생명체는 엘라이자에 의해 길들여져 자신을 실험실 밖으로 내보내준 히어로적인 면모까지 보인 엘라이자를 절대적으로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순종적인 괴생명체로 인해 엘라이자는 사랑을 쟁취한다.


비로소 이 영화는 장애 여성에게 비장애인과 똑같은 성적 욕망이 있고 그것을 실현하려는 나름대로의 노력이 있다는 것을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이러한 변화된 시각을 전달하기 위해 영화 도입부에 다소 충격적으로 여겨질 수 있는 자위장면을 배치했다. 그간 영화 이데올로기 속에서 장애 여성은 무성(asexual)적 존재라고 생각되고 성욕마저 없을 것이라고 가정되어 왔다. 그러나 <셰이프 오브 워터>는 본인의 성적 욕망을 분출하고 나아가 쟁취하기까지 하는 장애 여성을 통해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다시 고유의 영역으로 돌려 놓는다.


우리가 특정한 존재에게 배타적인 가정을 붙이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 많이 폭력적인 존재가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장애 여성을 무성(asexual)적 존재라고 가정한 행위 역시 그렇다. 특히나 섹슈얼리티는 개인의 고유 영역이고 이에 대해 우리가 덧붙임을 하면 할수록 우리는 이들의 생명력을 해친다. 고유의 영역은 오직 본인 고유의 것이다.



*참조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주체의 구현>, 유진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