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르고스 란티모스 <더 랍스터>
본래 무엇을 갖고 있지 않은지가 중요한 것이 사랑의 세계이므로 데이비드의 ‘없음’과 여자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때, 둘 사이에는 격렬하지 않지만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즉 함께 있을 때만 견뎌지는 결여가 있는데, 없음은 더 이상 없어질 수 없으므로, 둘은 서로를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사랑을 받기 시작하면 우리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새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타인의 사랑은 질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이 질문과 더불어 내 안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서서히, 어떤 일이 벌어진다. 내 안에 비어 있다 생각한 부분이 채워지면서 커지거나, 채워져 있다 생각한 부분이 사실은 비어 있었음을 깨달으면서 작아지거나, 후자의 변화, 즉 타인의 사랑이 내가 나를 더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결여를 인지하도록 이끄는 것, 바로 이것이 나로 하여금 타인의 사랑에 응답하게 만드는 하나의 조건이 된다.
<더 랍스터>는 ‘동질’과 ‘결여’에 관한 사랑 이야기이다. 이는 철저하게 이분법적인 세계를 다룬다. 우선 사랑에 관한 가치관부터 그러하다. 완전히 사랑을 택하거나 아니면 완전한 솔로가 되거나. 아내로부터 이별 통보를 받은 데이비드는 도시로부터 추방되어 커플 메이킹 호텔로 이송된다. 이곳 세상은 완벽한 짝만이 존재한다. 사람들은 강제적으로 커플이 되어야 하며, 만약 주어진 45일 안에 짝을 찾지 못하면 자신이 신청한 동물이 되어 살아가야 한다. 데이비드를 비롯한 호텔 안의 솔로들은 완벽한 짝을 찾으려 노력한다. 단, 완벽한 짝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동질의 무엇, 유사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를 통해 <더 랍스터>는 유사성이라는 논리 뒤에 가려 자행되는 사랑의 폭력성을 말한다. 주어진 45일이 다가오며 데이비드는 짝을 찾기 위해 거짓 유사성에 가담한다. 본래 자신이 가진 유사성(혹은 결여)인 ‘근시’가 동질이 될 만한 상대를 만나지 못하게 되자 데이비드는 비정한 여자에게 접근하여 자신도 비정한 남자 즉, ‘비정함’이라는 유사성을 연기하며 완벽한 커플로 인정받고자 한다. 이때 데이비드가 보이는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에 대한 대답은 자신 안의 결여를 인지하도록 이끄는 것이 아닌 본인의 자아를 박탈하고 새로운 자아를 주입할 만큼 ‘커플 메이킹 호텔’이라는 거대한 담론에 의해 희생된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거짓 유사성은 늘 그렇듯 실패로 결론 난다. 데이비드는 자신의 형을 발로 차 죽인 비정한 여자의 실험에 의해 정체가 탄로나게 되며 결국 호텔을 탈출하여 외톨이들의 숲으로 가게 된다.
숲은 앞서 완전한 커플을 지향하는 호텔과 다르게 완전한 솔로를 지향하는 공간이다. 숲은 모든 면에서 호텔과 정반대이다. 이곳에서는 완전한 솔로의 형태만이 허락되며 사랑, 즉 짝을 이루게 됨과 동시에 가혹한 형벌이 내려진다. 이는 호텔에서 짝을 이루지 못하면 자신이 신청한 동물이 되어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역설적이게도 완전한 솔로를 지향하는 숲에서 데이비드는 완벽한 짝을 만나게 된다. 자신이 가진 결여인 ‘근시’와 동일한 속성인 근시 여자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커플과 사랑이 허락되지 않는 ‘외톨이들의 숲’이라는 거대한 담론에 의해 근시 여자는 눈이 실명되는 가혹한 형벌을 받는다. 이로써 두 사람의 유일한 공통 속성이었던 근시가 부재하게 되며 데이비드는 더 이상 자신이 가진 결여인 근시를 사랑의 증거로 주장할 수 없게 된다.
앞서 말한 사랑의 논리에 의해 데이비드가 여자를 사랑하는 데 성공할 수 있으려면 여자의 결여(눈)만큼의 결여를 제 안에서 발견해야 한다. 호텔에서 비정한 여자와 커플이 되기 위해 ‘비정함’이라는 동질(혹은 결여)를 조작해낸 것과 지금 데이비드가 직면한 동질(혹은 결여)은 다르다. 사랑의 대가로 받은 여자의 실명은 장애이고 ‘장애’라는 요소는 사랑의 논리학에서 결정적인 요소인 ‘결여’의 은유일 수 있기에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라는 여자의 물음에 대해 데이비드는 진정 자신의 안을 들여다볼 기회를 얻게 된다.
그리고 데이비드는 대답한다. 여자와 함께 숲을 떠나 들어온 도시 식당에서 데이비드는 마침내 나이프를 들고 화장실로 향한다. 그러나 나이프를 자신의 눈을 향해 찌르려는 순간 영화는 끝이 난다. 데이비드가 자신의 눈을 찌르지 않고 여자를 두고 도망을 갔는지, 여전히 거울 앞에서 망설이고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둘의 사랑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데이비드는 스스로 자신의 눈을 찔러야 한다. 그래야만 사랑하고 있는 사람과 그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밝히기를 요구받는 다른 한 사람 사이의 대화가 비로소 완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질문에 “나도 너를 사랑해”라는 대답으로 말이다.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스스로 눈을 찌른 데이비드는 자신의 ‘없음’을 상대에게 줌으로 정확한 사랑을 완성한다. 본래 무엇을 갖고 있지 않은지가 중요한 것이 사랑의 세계이므로 데이비드의 ‘없음’과 여자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때, 둘 사이에는 격렬하지 않지만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즉 함께 있을 때만 견뎌지는 결여가 있는데, 없음은 더 이상 없어질 수 없으므로, 둘은 서로를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덧붙여, 흥미롭게도 데이비드가 되려고 했던 동물인 랍스터도 본래 시력이 좋지 못하다고 한다. 결국 솔로로 남아 랍스터가 되든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스스로 눈을 찌르든 데이비드는 좋지 못한 시력으로 살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랍스터는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깊고 어두운 물속에서도 100년을 넘게 살아가는데 랍스터가 되고 싶다고 한 데이비드가 랍스터의 이러한 생태적 환경을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즉 데이비드는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을 사는 것이 중요하지, 앞을 볼 수 없는 답답함은 그에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참조
<정확한 사랑의 실험>, 신형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