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평화를 가득 담고 상생의 항해를 하길 바라며
황석영의 <손님>을 읽고
황석영의 <손님>을 읽는 동안 사실 중반부까진 그리 끌림이 없었다. 현실과 비현실의 난해한 전개, 군데군데 던져 놓기 만한 짤막한 사연들이 맥락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읽기 중에 ‘작가 후기’를 읽고 이 글의 문체적 특성을 이해하게 되었고 후반으로 갈수록 최인훈의 <광장>처럼 시대문학으로서 당연히 읽어야 할 필독서처럼 꽂혀왔다. 다시 처음부터 반복해 읽으면서 주제의 윤곽이 뚜렷하게 잡혔고 2001년 출간된 이 책이 2018년 오늘 우리 모두에게 전하는 메시지임에 놀랐고 작가의 높은 안목에 감동했다.
<손님>은 남북전쟁 당시 <신천군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주인공인 류요섭 목사가 고향방문단 일행으로 북한에 가기 사흘 전 갑자기 형 류요한이 숨을 거두고, 요섭은 화장하고 남은 형의 뼛조각 하나를 챙겨 넣은 채 평양으로 떠나면서 본격적인 전개가 펼쳐진다.
요섭은 비행기에서 요한의 유령과 동행하게 되고 요한이 북에 남기고 온 아들 단열과 형수, 외삼촌을 만난다. 형의 헛것은 50년 전 과거의 기억으로 그들을 불러들인다. 외삼촌과 하룻밤 자는 동안 검은 유령들이 찾아와 산 자와 죽은 자들이, 죽인 자와 죽임을 당한 자들이 해후한다. 그들은 각자의 입장에서 공평하게 저 마다의 그때를 이야기하며 화해를 한다.
떠나기 전 요섭은 찬샘골 양지 바른 곳을 찾아 형수가 간직해 온, 요한이 단열을 받은 요한의 내복을 태우고, 형의 뼛조각을 묻는다. 요섭은 형의 죄를 대신 회개하고 원혼들을 달랜다.
작가는 ‘손님’을 맑스주의와 기독교로 칭한다. 공통점은 둘 다 서양사상이며 민족의 의사에 의해 들어왔다기보다 허락없이 들어와 분열의 부작용도 낳았다는 점이다. 그 부작용은 단순 분열을 떠나 잔인무도하게 죽어간 수많은 원혼들을 남겼다. 무엇을 위한 이데올로기이며 무엇을 위한 종교인가.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성공한 이념은 없다. ‘나만 옳고 너는 틀리다’는 극단순한 명제로 세상을 지배하려던 극소수의 욕심이 확대되어 세계인류가 분열되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그 피바람 위에 약소국들은 그들의 처절한 희생자가 되기도 하고 때론 더 악랄한 조력자가 되기도 했다. 그 희생의 중심에 선 나라가 한반도였다. 중국과 일본, 미국과 소련, 미국과 중국의 눈치를 보며 현재까지 이어진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임이 이를 증명한다.
이 작품에선 한 단면을 보여준 것이지만 세계적으로 종교의 대립도 이념 대립 못지않게 크다. 여전히 현재진행형 속에서 종교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종교라는 의미 속에는 어떤 종교든 평화, 사랑, 자비, 삶의 위안 등이 내포되어 있다. 하지만 실상은 종교가 그 숭고한 가치를 실천했는지 의문이다.
요한이 이찌로의 코뚫은 철사를 잡아당기면서 ‘이거이 다 우리 하나님이 내리넌 천벌이다.’나 ‘서루가 서루를 믿디 못해서 저 새낀 수박이다 아니다 사과다 아니다 감이다. 진짜배기 청참외다. 퍼랭이냐 벌갱이냐 아니문 뻘갱물든 퍼랭이냐 퍼랭물든 뻘갱이냐. 하여튼간 물든 것덜은 다 쥑이야 되었다.’는 외삼촌의 말에서도 무지한 인간들의 독단적 사고, 그 단순함이 깔려있다. 하나님을 내세우며 살육을 자행했고 그들은 한 여자를 대상으로 집단 강간도 서슴지 않았으며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었다. 요한의 말대로 그들은 눈빛을 잃어갔고 편먹기 또한 끝났다. 상호는 요한의 누이들을 죽였고 요한은 그 보복으로 상호의 약혼녀 명선네 가족을 죽였다. 그들은 모두 온 가족이 하나님을 찾던 이들이었다. 하나님을 찾았든, 맑스주의를 찾았든, 자본주의를 찾았든지 간에 그들 어느 누구에게도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없었다. 욕심을 향한 저열한 자기합리화만 있을 뿐이었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외세에 의해 일어난 민족전쟁과 민족분열, 가족같이 지낸 이웃들이 종교와 이념차이로 총칼을 겨누고 벌인 잔인한 놀음, 그 어설픈 오해에 따른 한민족간의 학살에의 반성과 화해를 바라고 있다.
정치보위부 사무실을 점령한 기독청년들은 뒷마당 우물에서 시체 삼십 여구를 발견하는데 그 속에서 상호아버지 조 장로의 시체도 나왔다. 이찌로의 코뚜레를 꿰서 끌고 가는 요한이, 빨개 벗겨 탄띠로 후려치고 발로 차고 그 몸에 휘발유를 붓고 성냥을 그어 댄 봉수, 어느 한쪽도 정상적인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무엇을 위한 집단파괴, 집단폭악이었는지 살아있는 자든 죽은 자든 우리 모두는 먼저 반성부터 해야 한다.
‘나넌 평생에 누굴 미워해본 적이 없대서 기래두 입성 얻어 입구 좋언 날 되문 고봉 밥을 얻어먹구 군입소리 듣디 않을라구 땅을 파대구 또 파댔넌데’
봉수가 죽인 남자는 소작인이었고 순남이 아저씨는 요한이네 일 도와주며 드난살이하던 사람이었다. 이찌로 또한 자신의 뿌리도 모른 채 거의 평생을 엎드려 산 인생이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잠시의 ‘완장’은 어쩌면 그들에게 살아있는 생기를 주었을 것이다. 한 번도 펴보지 못했던 허리를 활짝 펴봤을 때의 시원한 쾌락이 그들에겐 참으로 달았을 것이다. 그들이 지주들에게 행한 일련의 횡포들이 정당화 될 수는 없다. 마땅히 죄의 대가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들의 인생에 대한 동정어린 배려는 있어야 했다. 지주들은 그들의 굽은 삶을 당연시만 보았기에 결국 곪아 터져버린 것이다. 가족을 잃고 사탄을 없앤다며 저지른 기독청년들의 만행들, 과연 그들의 하나님이 바라신 일일까?
지옥의 살육마당이지만 그곳에서도 한 점의 희망은 발견된다. 문화선전대 누나들을 숨겨주고 먹을 것을 챙겨주는 요섭이다. ‘사람덜 죽는 거 싫어요.’ 이런 동생의 순수를 짓밟고 그 어린 소녀들을 잔인하게 죽여 버린 하나님을 따르는 형 요한,
‘우리가 요한이를 데레가기 전에 갸가 죽인 사람덜이랑 풀어줄라구기래. 죽으믄 잘잘못이 다 사라지지만 짚어넌 보구 가야지.’
그렇게 죽인 자들과 죽임을 당한 자들이 모여 화해를 했고 그들은 모두 사라졌다.
이제 그냥 꿈이 아닌 진짜 현실로 우리들의 눈앞에 화해의 장이 펼쳐지고 있다. 송곳도 들어가지 않을 것 같았던 남북 간의 좁디좁았던 불통의 구멍, 이제 서서히 어둔 장막은 내려지고 상생의 서막이 시작되는 듯 하다.
‘갈 사람덜은 가구 이제 산 사람덜은 새루 살아야디. 저이 태 묻언 땅얼 깨끗허게 정화해야디 안카서?’
외삼촌의 이 한마디 속에 이 글의 주제가 오롯이 함축되어 있다. 또한 상생의 삶을 위해 어떤 마음자세가 필요할까는 외삼촌 은사님의 당부 속에 담겨있다.
‘늘 보넌 식구들콰 동니사람들하구 잘해야 한다구. 길구 제 힘으루 일해서 먹구살디 않으면 덫을 놓아 먹구살게 되넌데 기거이 젤 큰 죄라구 말이다.’
전쟁과 살육으로 원한이 맺히고 맺힌 이 천지를 정화하고 평화가 자리 잡게 하는 길은 개개인이 이러한 마음을 새기고 스스로를 경계하며 살아가면 되는 일이다.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않는가?
(기독교에 대한 비판은 본 책 중심에서 쓰게 됐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