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길, 지식인의 길

드높은 민족성과 참 인재의 육성

by 윤아진

인간의 길, 지식인의 길

우리는 반만 년 우리 역사 가운데 현재와 가까운 해방 후 40여 년의 현대사와 일제강점기 독립 운동사를 올바르게 배우지 못했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요직에 앉은 친일파들이 오히려 애국자가 되어 왜곡된 역사를 가르쳤기 때문이다. 최남선, 이광수, 노천명, 모윤숙 등의 친일 문인을 국어교과서에서 배우고 징병·징용을 종용했던 김활란을 국사교과서에서 선진 여성의 롤모델처럼 배웠던 시절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건 역사교과서가 국정에서 검정으로 전환되면서 좀 더 넓고 진실된 역사를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역사를 바로 세우고 제대로 들여다보는 것은 곧 징비(懲毖) 며 내일을 위한 올바른 설계다. 역사를 망각하는 것은 민족혼이 말살되는 것과 같다. 조국은 민족의 것이지 이념주의자들의 것이 아니다.

간송박물관 설립자 전형필 선생과 고려박물관 설립자 정조문 선생은 비록 나라는 잃었을 지라도 문화재에는 민족혼이 실려있으니 그 혼은 지켜야한다는 일념으로, 사재를 털어 국내외로 흩어진 우리문화재를 사들였다. 신채호·박은식 선생은 붓끝으로 민족의 뿌리를 지키고자 했다. 그리고 수많은 민중은 온몸으로 아픈 역사를 썼다.

민족, 겨레를 지켜낸 진짜 주인공은 평범한 아니, 그것보다 못한 삶을 산, 밟으면 밟혀야 하는 잡풀같은 민초들이었다. 그들은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장렬하게 싸우고 또 죽어갔다. 몽골 침입 때도 지배 계층은 강화도로 천도해 백성은 죽든 말든 호의호식하며 살았지만 나라를 지켜낸 이들은 민초들이었다. 개경 환도까지 40년 가까운 전쟁, 당시 세계를 제패하다시피 하며 거침없이 정복해나갔던 몽골도 고려백성들의 항쟁에 지쳐 고려의 강화 요청을 반겼다. 임진왜란 때도 왕은 자기 몸 보신 위해 피난가기 바빴지만 남은 백성들은 자기들 버리고 떠난 아버지를 원망하면서도 집을 지켜냈다. 신미양요 당시 미군의 기록은 비장함과 함께 애처로움을 자아낸다.

‘조선의 군사들은 노후한 전근대적 무기를 가지고 용감히 싸웠다. 그들은 항복을 아예 몰랐다. 무기를 잃은 자는 죽음을 각오하고 맨 손으로 싸웠으며 부상자는 돌이나 흙을 집어 던지며 저항하였다. 나중에 전투가 불리해지자 잡히지 않으려고 바다에 몸을 던지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마도 우리는 가족과 국가를 위해 그토록 강력하게 싸우다가 죽은 국민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우리 민족, 그 영웅들은 국가 위기 속에서 늘 그렇게 호방한 기백을 보였다. 일본이 경복궁을 장악했을 때도, 외세로부터 오직 나라를 지키기 위해 호기롭게 일어나 싸운 이들은 한번도 인간적 대우를 받아보지 못했던 하층민들이었다. 그런 어여쁜 백성을 오히려 외세의 힘으로 죽이고 쓰러뜨린 이들은 어이없게도 백성을 지켜줘야 할 국모를 비롯한 관리들이었다. 수많은 외세 침략과 약탈의 고통 속에서도 민중들은 오직 나라를 위해 크고 작은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바로 그것이다. 그것이 우리 민족의 힘이다.

그렇게 고비 고비를 넘기며 백성이 지켜낸 나라를 아예 통째로 넘겨버린 기막힌 사건이 터졌다. 지배하려는 자는 널리고 널렸지만 백성을 위하는 지도자는 귀하고 귀했다. 민(民)을 생각하는 마음이 곧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다. 민(民)이 없이는 나라는 있을 수 없다. 하지만 다수의 인간은 권력을 등에 업으면 가지고 있던 자신의 신념마저도 망각해버리고 만다.

일본인보다 더 나쁜 인간은 친일파와 그 앞잡이들이다. 피붙이를 팔아 자기 배를 불린 것과 같은 행동이다. 때로 36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생활고로 살짝 발을 담근 이들이 친일로 매도되는 것은 안타깝기도 하다. 문제는 산 전체를 태운 이는 아주 잘 살고 있는데, 그 산불 번지지 않게 하기위해 자기 몸 타는 줄도 모르고 끄려 했던 이들이 오랫동안 너무 고통당하며 살았다는 것이다. 또한 매국노들이 자기들 잘못은 전혀 반성하지 않은 채 진짜 민족 애국자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제거하는 행위들이 아무렇지 않게 자행되었다는 점이다. 약산 김원봉은 조선총독부가 가장 두려워한, 일제가 가장 많은 현상금을 내걸었던 독립 운동가였다. 약산은 1947년 2월, 친일 경찰로 악명 높았던 미군정 경찰 노덕술에게 끌려가 뺨을 맞는 등의 치욕을 겪었다. 이 사건은 독립운동가의 불행과 친일파들의 출세 행로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일본인들은 친일파들을 철저하게 이용하면서도 속으로는 한없이 비웃었다. 일왕에 대한 충성심이 뼛속까지 투철한 그들의 눈에 일제의 밑닦이 노릇하는 친일파들의 행태는 경멸이라는 또 다른 시선을 담아냈다. 일본의 조선지배를 인정한다는 ‘카쓰라-테프트 밀약’을 조종한 미국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조선 사람들은 자기나라를 방어하기 위해서 손가락 하나 쳐들지 못하는 민족이다.’1) 는 모독 발언을 했다. 조선인을 미개한 백성으로 만든 것은 친일파들이다. 자기 민족, 이웃을 고문하고 죽이는 것에 한 점 양심의 가책도 없이, 일제 앞에 굽신거리는 모습을 보이는 친일 앞잡이들. 일본인들 눈에는 함부로 주물러도 되는 미천한 생물로 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인 대한제국 외교고문 스티븐스는 을사늑약, 고종 강제퇴위, 정미7조약 등 일본의 굵직한 침략정책을 잘 수행한 일제의 하수인이었다. 그 공로(?)로 일제로부터 6차례의 훈장과 엄청난 포상금까지 받았다. 그는 본국에 도착하자마자 기자회견을 열어 “일본의 조선지배는 조선에 유익하다. 을사조약은 조선인을 위해 취해진 당연한 조치이며 조선인은 독립할 자격이 없는 무지한 민족이다.”라는 망언을 쏟아냈다. 한인동포들은 분노했고 스티븐스를 찾아가 기자회견 정정을 요구했지만, “조선에는 이완용 같은 충신이 있고 이토같은 통감이 있으니 조선의 행복이요. 백성이 어리석어 독립할 자격이 없으니 일본이 아니면 러시아에 빼앗겼을 것이다.” 아아!!! 이 망언을 듣고 분노하지 않는다면 조선인이라 말할 수 없으리라. 한인대표는 분노해 주먹을 날렸다.


1908년 3월 23일, 일면식도 없었던 두 청년 장인환, 전명운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운명처럼 만났다. 두 청년의 목적은, 조선의 녹봉을 받으며 일본을 도와 일본을 위해 일했던 스티븐스를 사살하기 위해서였다. 스티븐스가 워싱턴으로 가기위해 페리 항으로 간다는 정보를 입수한 두 청년은 각각 또 다른 한인 누군가가 자신처럼 와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스티븐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스티븐스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전명운이 먼저 다가가 방아쇠를 당겼다. 애석하게도 발사되지 않았다. 실패를 깨달은 전명운은 총구로 스티븐스 얼굴을 강타했고 화가 난 스티븐스가 전명운을 쫓았다. 그 순간 장인환이 총을 발사했다. 두 사람의 몸이 뒤엉킨 탓에 첫 번째 탄환은 전명운의 어깨를 맞히고 말았다. 이어 두 번째, 세 번째는 스티븐스의 등, 허리를 관통했다. 이틀 후 스티븐스는 죽었다. 다행히 전명운은 경상이었다. 이 사건은 미국과 서구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1908년 3월 25일자 <크로니클 신문>에 장인환의 글이 실렸다.

<내가 왜 스티븐스를 죽여야 했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스티븐스의 음모로 인해서 수천 명의 우리 국민들은 살해당했고, 그가 조선으로 다시 돌아가면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될 것입니다. 나는 더 이상 스티븐스 때문에 우리동포가 희생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 내가 스티븐스를 죽이고 죽을 수 있다면 그것은 내 나라를 위한 영광으로 생각하겠습니다.>

<뉴욕타임스>는 ‘조선민족은 아직도 살았다’라는 제목으로 사설을 실었다.2)

비로소 조선 독립의 염원이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한국독립운동 사상 최초의 의열 투쟁’이라는 방아쇠를 당긴, 우리 민족에게 큰 의미를 준 혁명의 시작이었다.

장인환은 당시 33세로 어려서 부모를 잃고 미국으로 이민해 공장, 식당에서 일하며 힘겹게 생계유지를 하고 있었고, 25세였던 전명운 또한 어려서 부모 여의고 미국으로 이민, 농장과 어장에서 학비와 생활비를 벌던 고학생이었다.
전 세계가 주목하는 재판이 시작되었고 세계에 흩어져있던 한인사회가 뭉쳤다. 재판을 위한 의연금이 모이기 시작했고 변호사 선임비 등 모금액이 8,568원 41전(현재 수억 원의 가치)이었다.3) 그 모금액은 현 화폐가치로 평가하기보다 한인 개개인의 지극한 정성으로 봐야 한다. 그들은 황인종이라는 인종차별에다 조선인이라는 차별까지 더해져 일본인보다 못한 임금차별은 물론 이름이 아닌 죄수처럼 번호로 불리며 인간 이하의 온갖 모욕을 다 참아내야 했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고된 노동과 짐승에게만 날리는 채찍에 시달려야 했다. 생계도 벅찼던 그 적은 임금에서 떼 낸 성금은 살을 떼 낸 것과 다름없는 귀한 정성이었다. 사형을 받게 하려는 일본의 방해공작들이 있었지만 8차례에 걸친 배심원들의 비밀투표 끝에 전명운은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장인환은 2급살인죄 25년 형을 받았다. 장인환은 미주 한인들의 석방노력과 모범적인 수용생활 덕분에 복역 10년 만에 석방됐다. 사건 이후 또 다른 조선인 애국청년 장인환, 전명운은 수없이 탄생됐다. 자국(自國)의 녹을 먹으며 자기 민족을 미개한 족으로 만든 건 친일 매국노들이었지만, 민초들은 고달픈 삶을 살면서도 엎어지고 짓밟혀진 민족의 자존심을 당당하게 다시 세웠다.

약은 지배자의 시야는 너무나 좁아서 자기 안위밖에 생각하지 않기에 끝없이 양심을 버리는 비루한 짓거리를 이어간다. 결국 경술국치라는 치욕세상을 만들고 자국민을 무단 헌병 통치라는 무시무시한 지옥 세상에 담갔다. 그리고 자기들의 분신을 낳고 또 낳았다. 밀정과 끄나풀들. 3·1만세 운동 후 일제의 문화통치 속에는 더 야비한 분열통치가 숨어있었다. 조선인이 조선인을 잡아먹게 하는 전략, 거기에 맞장구치며 일제에 충성한 친일파, 그들의 동조, 협업이 있었기에 일제는 더 뻔뻔하게 조선 땅 곳곳을 누비며 사람이든 물건이든 자기들 마음대로 노리개로 삼을 수 있었다.

< 산 채로 땅에 묻기도 하고 불로 태우고 가마솥에 넣어 삶기도 했다. 코를 뚫고 갈빗대를 꿰며 목을 자르고 눈을 도려내고, 껍질을 벗기고 허리를 자르며 사지에 못을 박고 손발을 끊었다.>4)

이것이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짓인가? 하지만 그저 한 ‘예’에 불과하다. 일제가 우리 민족에게 행한 악랄함들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들은 저런 극악무도한 짓을 오히려 즐기며 희희낙락하며 사진으로도 남겼다. 악마다.

우리는 현재, 나라를 지켜낸 수많은 선조들 덕분에 자유가 있는 나라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다. 그분들이 남긴 흔적들을 살피며 그분들의 기운들을 우리의 사고 속으로 고취시켜가야 한다. 오늘날까지 우리는 점점 이기주의와 개인주의화 되어 왔다. 개인주의가 나쁘다 진단할 수 없지만, 무관심이 더해진다면 달라진다. 더불어 산다는게, 자유가 있다는 것이, 함께 나눌 민족이 있다는 것이, 조국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할 일인지 느끼지 못하고사는 듯하다.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사는 우리 민족 디아스포라들이 오히려 민족정신을 잊지 않으려 애쓰는 듯하다.민족정신이 흩어지지 않고 모아져 고유한 우리 민족의 본성을 되찾고, 더 나아가 세계를 이끄는 민족으로 도약하려면 우리는 선조들이 남긴 뜨거운 피의 정신을 잊어선 안 된다.

이제 세계는 국가를 넘어 세계 평화를 위한 지구인의 시대로 향하고 있다. 남의 아픈 상처 헤집어 잇속만 챙기려는 얄팍한 인성을 가진 이는 도태되고 최소한이라도 ‘인간에 대한 예의’를 아는 이들이 있는 세상, 억울한 이 없이 어느 곳에서나 최소한의 정의가 살아있는 대한민국으로 가는 길만 열리길 바란다. 참인간의 길이며 국격을 높이는 올바른 나라사랑의 길이다.


진정한 공부의 길이란, 사람이 되는 근본을 닦은 후 인간사를 위해 바르게 쓰고자 하는 데 있다. 그 어떤 똑똑함도'사람다움'을 잃으면 허깨비와 다름없다. 구겨진 역사를 소환해 바로 펴고 얼룩은 닦아내고, 투명한 역사를 올곧게 써나가는 것이 학문을 한 자의 기본 도리다. 곧 바람직한 지식인의 길이다.


1) 조정래 「아리랑」2권 해냄 108쪽

2) 위 책 107쪽

3) ‘스티븐스 사살’ 사건개요는「우리가 몰랐던 독립운동가」장인환 편에서 참고 또는 발췌함

4)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하권 남만성 옮김 서문당 1999 2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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