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응의 글쓰기 21기 3차시 과제
생애 처음 팬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좋아했던 연예인이 서태지다.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이 <난 알아요>로 데뷔해 1년에 한 번 꼴로 앨범을 내며 온 나라와 청소년 자녀를 둔 가정을 흔들어댔다. 나는 5학년 때 문제의 3집을 들은 뒤로 덕질을 시작했다. 지금은 팬덤, 덕후라는 양지의 개념어가 존재하지만 그때는 다들 음지의 빠순이, 빠돌이였다. 나는 과거로 시간을 돌려 1집부터 이제까지 발매한 전 앨범을 사 모으며 수록곡들을 머릿속에 주입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속해있던 기획사 위프로덕션의 연희동 매장에 뻔질나게 드나들며 사진과 포스터, 책받침 따위를 사들이기도 했다. 아빠는 사업이 망한 뒤 대리운전을 하고 엄마는 전업주부에서 동네 수퍼 정육코너 판매원으로 생활전선에 나서야 했던 시기, 바퀴벌레 들끓는 어두컴컴한 삼각맨션의 딸에게 그것들을 살 돈이 어디서 났는지 지금도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당시에는 어떻게든 마련되기 마련이니 덕질이란 참 신묘하다.
3집 타이틀곡은 <발해를 꿈꾸며>였고 후속곡은 <교실 이데아>였다. 시나위 베이시스트 출신의 서태지가 태생의 로큰롤 재질을 전면에 드러내기 시작한 앨범이다. 이 앨범은 대중이 록에 입문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고 내게도 그랬다. 난 서태지를 통해 록밴드 크래시, 시나위, 한국 록의 거장 신중현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국내 록신을 팠고, 서태지가 X-Japan의 베이시스트 타이지에게서 이름을 따왔다고 해서 X-Japan으로 넘어갔다가 화려한 일본의 록신을 팠다. 레퍼런스가 많은 서태지의 음악은 무수한 출구를 가진 인터체인지였다. 미국과 유럽의 록신은 신대륙처럼 드넓었다. 링킹파크로, 메탈리카로, 너바나로, 라디오헤드로 나는 종횡무진하며 취향을 넓혀나갔다. 학교 앞 레코드 가게의 털보 아저씨, <핫뮤직>과 <서브> 등의 음악잡지와 부록으로 주던 샘플러 CD, MP3 음원을 무료로 받을 수 있던 파일 공유 프로그램 소리바다는 내 강력한 서포터였다. 현재 내 음악 취향의 기본값이 록으로 매김된 것은 그 시절 서태지를 타고 록의 토양으로 넘어온 결과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은퇴했을 때, 방구석에서 홀로 서태지는 알지도 못하는 단식 투쟁을 벌이며 애먼 부모와 친지들의 속만 태우던 나였지만, 시간은 약이고 세상엔 서태지 말고도 덕질할 거리가 넘쳐났다. 게다가 서태지는 몇 년 후 솔로로 컴백했으니 그때 단식으로 굶어 죽었다면 얼마나 억울했을까.
중학교 때 하루는 방에서 코딱지만 하게 데스메탈 음악을 틀어놓고 들을 때 아빠가 들어왔다. 난 아빠가 소싯적 학교에서 록밴드를 했다고 알고 있었기에 내 듣는 귀는 아빠의 취향을 물려받았다 생각했다. 그래서 공유하자는 차원에서 무슨 음악이냐고 물어볼 줄로만 알았다. 아빠는 예상대로 누구 음악이냐고 물어보았고, 내가 대답하자 이게 얼마나 나쁜 음악인지 아느냐고 야단쳤다. 이런 음악 듣지 말라며 뒤돌아 나가는 아빠의 모습에 나는 그만 뒤통수가 얼얼했다. 그 뒤론 가방에 CD를 싸들고 다니며 학교에서 들었다. 덕분에 교실에서 난 ‘책상 위에 CD 쌓여있는 애’였다.
그렇긴 해도 내 CD와 테이프들은 부모의 손에 내동댕이쳐지는 일 없이 잘 보존됐다. 어른이 된 자식은 그 아빠를, 제재는 해도 파괴는 하지 않던 순한 부모였다고 평하지만, 한편으로 그 대한민국 일상다반사의 작은 순간이 왜 이토록 오래 기억되고 있을까도 생각한다. 불화가 일상이던 집구석에서 번뜩 소통의 물꼬를 기대한 마음이 무너지던 한순간의 좌절. 반색하던 표정을 신속히 냉소로 전환하던 싸늘한 찰나의 판단.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여느 경험처럼 그 기억도 이후의 내 삶에 영향을 미쳐왔을 것이다. 호의적으로 다가온 상대가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고 돌변할 것에 대비하고 있게 말이다.
대학 다니며, 직장 다니며, 사람 만나고 남자 만나며 술 먹느라 방구석 리스너로 20대를 다 보내고 자취를 시작한 스물아홉, ‘마침내’ 음악 취향, 문화 취향 맞는 록음악 동호회를 만났다. 놀 시간과 돈과 의지가 있는 사람들의 결속과 록페 흥행기라는 시대적 배경이 맞물리자 결과는 폭발적이었다. 오랜 세월 묵묵히 누적된 각자의 덕력이 화산처럼 분화했다. 그 기세로 30대 중반까지 홍대 라이브클럽과 온갖 록페스티벌과 록스타의 내한 콘서트를 정복했다. 모임 안에선 수시로 커플이 생겼다 깨졌고 나도 모임장과 3년여 간 연애를 했다.
저물었다는 건 누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공기로 느낀다. 원 없이 놀아봤다 말할 수 있는 한 시절이 끝났다. 다들 먹고살기 빡빡해질 때쯤 모임에도 균열이 생기고 커플들도 깨지고 주거지도 서로 멀어지고 록페도 망하고 코로나도 왔다. 모임은 격렬한 융합 대신 느슨한 연결로 양상이 바뀌었고 나도 모임장과 연애 종료 후 방구석 리스너로 돌아왔다.
취미가 부실해진 난 회사 일에 올인하기 시작했다. 일상이 무미건조해질수록 일하는 초자아는 비대해졌다. 그런 와중에도 간간이 해체한 미국 록밴드 화이트스트라입스나 방탄소년단을 파고든 시기가 있었지만 육체를 대동하지 않고는 못 견딜 정도로 의욕이 끌어올려지진 않았다. 그것도 덕질이긴 했겠으나 좀처럼 불이 붙지 않았다. 난 계속 방구석을 지킨 채 직장에서 사용하는 페르소나에 내 에고를 몰빵하며 위태롭게 달려갔다.
그리고 마침내 일이 터졌다. 거품이 꺼지고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일어났다. 부풀대로 부푼 초자아가 붕괴해버렸다. 일하는 자아에 기능 장애가 생기자 회사는 순식간에 싸늘하게 표정을 바꾸었다. 나는 공황증과 불안증을 얻고 바보 멍청이가 되어 마지막 회사를 퇴사했다. 그 연쇄 작용은 대단했다. 난 1년 넘게 우울감에 시달리며 요가와 명상을 했다. 생애 전체를 복기하며 자책의 수렁에 빠졌다가 울화가 치밀었다가 모든 게 의미 없다 허무를 씹었다가 하며 정신적 방황을 했다.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책도 읽으며 치유에 온힘을 쏟았다. 살아갈 이유나 의미까진 몰라도 의욕은 좀 찾아야 했다. 그러던 중 유튜브에 뜨는 섬네일에서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클릭해 영상을 보았다. 그리고 생의 덕질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 JYP 소속 아이돌 스트레이키즈(스키즈) 현진의 팬이다. 유튜브, 브이라이브 구독은 물론이고 멤버들과 톡처럼 대화할 수 있는 버블도 유료 결제했다. 이제껏 낸 앨범을 전부 샀고 난생 처음 음방을 보러 여의도 KBS 공개홀에도 갔다. (가서 현진의 실물을 보고 손도 흔들었다.) 달력앱에 스케줄을 일일이 입력해 그날그날 챙겨보다 보니 스키즈의 스케줄이 곧 내 스케줄이 된다. 가장 중요한 건 포카다. 요즘엔 포스터나 책받침이 아니라 포토카드다. 하나둘 모으다 보니 드래곤볼처럼 물욕이 샘솟는 게 개미지옥이다. 당근과 오픈채팅방에서 포카 거래 게시물을 틈틈이 확인하고, A4 바인더에 포카를 모은다. 포카가 훼손되지 않게 슬리브 따위에 끼워서 보관한다. 슬리브도 그냥 투명 비닐이 있고 홀로그램이 있으니 사진에 맞게 적절히 취한다. 같은 그룹을 좋아하는 동생을 만나 덕담(덕질 담화)을 나누며 말했다. “우리 오래 살자.” 현진을 오래 봐야 하니 말이다.
현진은 숙소에 있는 개인 시간엔 거의 그림만 그린다. 수채, 유화 등 취미 치고는 제법 진지하다. 보다 보니 따라 그리고 싶어져서 아이패드만 쓰던 나도 드로잉북을 사서 매일 그리기 시작했다. 하다 보니 또 본격적으로 하게 돼서 유화와 수채, 색연필, 마카, 오일파스텔 등 이런저런 재료를 구비해 시도해본다. 한 가지에 의욕이 가득 차니 활력이 삶 전체로 순식간에 퍼진다. 매일 일어나서 모닝페이지를 쓰고, 쓰고 그리는 손에 생기가 도니 틈만 나면 손을 움직여 무언가를 하고 싶어진다. 덕질의 순기능이 온몸으로 구현된다.
그래서 오래전 서태지를 앓던 어린 내가 떠오른다. 서태지로 인해 알게 된 덕질의 감각. 그것이 얼마나 큰 삶의 동력인지 알고 있기에, 이 시점에 다시금 덕통사고를 당하니 마치 누군가 날 도와주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이 에너지가 어디서 다시 생겨났는지, 덕질이란 참 신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