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 상담에 대해 공부를 하게 되었다. 사실 공부하게 된 이유는 내가 나를 이해하기가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정말 찐 나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나와 같이 세심한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고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이해해 주고 싶었다.
학기가 시작되고 강의를 듣는 내내 심리는 나와 같은 병아리가 건드릴 수 없는 학문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직장 생활로 빠듯한 삶을 살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주어진 무언가를 뿌리 깊게 생각하기에 내가 너무 부족한 사람이란 걸 알게 되었다. 단순히 마음에 대해 공부하고 싶었던 건데 학문으로 넘어가니 점점 내가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점점 작아지는 나를 느끼며 꾸준히 들어야 하는 의무감으로 출석을 채우며 강의만 열심히 틀어 놓았던 것 같다.
그러던 중. 미술치료 강의 시간에 교수님의 과제에 의해 초심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나는 어떤 그릇인가?'에 대해 생각하며 찰흙이나 점토로 그릇을 만드는 과제였다.
나는 어떤 그릇일까. 과연 나는 어떤 그릇일까.
주황색 찰흙을 꺼내기도 전에 혼자서 멍 때리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침에 직장에 출근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며 혼자 중얼거리던 생각이 퍼뜩 났다.
'난 정말 그릇이 작은 것 같다....'
그때 생각했던 나의 그릇은 경력 부족에 유휴 간호사라는 이유로 나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내 주변의 것들을 담아내기에 부족해 보이는 나에 대해 작은 그릇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정말 작은 그릇일까. 내가?'
주황색 찰흙을 꺼내 아이가 쓰던 찰흙판에 꺼내 놓았다.
'어떤 그릇을 만들어 볼까. 내 그릇은 아주아주 넓으면 안 될 것 같은데..'
나도 모르게 나의 무의식에서 나의 그릇을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내가 완성한 그릇은 너무 넓지 않고 너무 깊지 않은 적당한 크기의 그릇이었다.
예쁜 그림이 있는 그릇도 아니고 화려한 장식이 달린 그릇도 아니다.
부담스럽지 않은 그릇. 그게 바로 내 그릇인 것이다.
과제를 제출하며 이 시간이 나에게 얼마나 뜻깊은 시간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나의 그릇을 보고 깨달은 건 애초부터 내 그릇을 과대 평가 하지 않았고 많은걸 욕심 내고 있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오은영 박사님 같은 사람은 본인의 그릇의 크기와 성질, 모양, 색깔에 맞춰 발휘하는 거고 나는 내 그릇에 맞춰 능력껏 담아 그걸 한껏 이용하면 되는 것이었다. 나의 그릇의 크기가 바다와 같이 넓어 모든 걸 포용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는 사람에겐 더없이 좋은 그릇의 크기를 가졌다는 걸 알았다. 이렇게 세상의 모든 그릇은 다양하고 쓰임새는 다른 것인데 왜 한쪽으로 치우쳐서 생각했던 것일까.
근래에 들어 가장 뿌듯한 시간이었고 가장 깨달음이 많은 시간이었다. 참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