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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챗쏭 May 10. 2019

마음만 챙겨 갑니다.

"선물 같은 여행"으로의 출발


                                                                 

어느 날 갑자기, 친구가 찾아와 이렇게 얘기한다면,

                               

       

"오늘부터 한 며칠 휴가 좀 낼 수 있어?"


물론 첫 반응은 대부분 이럴 것이다. "왜? 왜? 무슨 일 있어?"


조금 당황스럽지만 거부감 잔뜩 낀 얼굴로.


그런데 다음 말이 이렇다면?


"응, 너랑 여행 가려고 비행기표를 끊어놨어. 마드리드행 비행기표."


머릿속은 당장의 업무, 이것을 맡겨놓거나 미뤄두거나, 휴가를 내는 일이며 휴가를 낸다고 하는 이야기를 전할 직장 상사며. 어유, 못해 못해...


온갖 잡다한 거부의 이유가 난무한다. 당황스러움이 조금 잠잠해지면, 거부의 이유가 더 단단해지거나 혹은 '그래?' 하는 충동의 호기심이 슬며시 고개를 들어, 현실에 비집고 들어갈 '제껴!'의 이유를 찾아내거나. 당신은 어떤가.



                    


우리의 첫 유럽여행. 마드리드행 비행기표


                                                                       

작년 6월, 아내와의 작당모의를 통해 준비한 비행기표는 2019. 1. 19. 인천을 출발하는 '마드리드행 비행기표'였다. 그리고 6개월 넘게 아이들에게 비밀을 유지했다. 오로지 저 깜짝 이벤트를 위하여.


누군가 내게, 너를 위해 준비했어. 비행기표. 어딘데? 스페인... 이런다면... 나는 무척 놀랍고 당황스럽긴 하겠지만, 그리고 무척이나 큰 갈등을 겪어가며 얼굴 벌게지도록 흥분하다가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눈 딱 감고 용기를 한번 내어볼 수 있다면, 그 이벤트는 내 인생에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게 되리라는 상상이 이 일을 벌였다.


출발하기 하루 전 퇴근 후 아이들을 거실에 불러 모아 할 이야기가 있음을 알렸다. 뭔가가 있음을, 기분 좋은 뭔가가 시작되고 있음을 알아차린 아이들이 "뭔데? 뭔데?" 하고 호들갑을 떨다가는...


"아빠 가방 열어서 '파일'을 꺼내봐."

"와~ 비행기표다!"

"어딘데? 오빠 어디 가는 비행기표야?"

"마드리드. 진짜 마드리드 가? 우리 스페인 가는 거야?"

"응, 우리 모레 출발이야."

"으, 으, 으...."(이건 아들내미의 기쁨에 찬 울부짖음의 의성어다. 여전히 왜 울었는지 모르지만)


여행을 준비하며 쓴 편지. 비행기 안에서 공개했다.


                                                  

그렇게 우리는 첫 유럽여행을 떠났다



                                               

우리의 이벤트를 전해 들은 누군가는 아이들에게 스페인은 공부를 시켜서 데리고 갈 곳이라고도 했고 아이들에게도 미리 준비할 시간을 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를 했다. 모두 맞는 이야기라서 몇 번이고 아내에게 '애들에게 이야기해 줄까' 하는 포기의 순간을 넘기기도 했다.


일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여행의 본질이라면,

깜짝 놀랄 기쁨을 주는 것이 선물의 본질이라면,

"선물 같은 여행"을 아이들과 해보자는 것이 어렵사리 준비한 이 여행의 기획의도다.



결과적으로는 6개월 넘도록 이 날만을 기다리며 설렐 수 있는 기쁨을 아이들로부터 빼앗아버린 것이지만, 반면에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을 들고 온 아빠로부터 포장지를 뜯으며 느끼는 흥분을 짧고 굵게 기억할 수 있었으면 했다.


                                                          

십 년, 이십 년, 또는 그로부터 더 한참 후에 아이들이 이 여행을 떠올려, '우리가 그때 본 마드리드의 왕궁과 광장이 멋있었어. 프라도 미술관의 고야의 작품이 좋았어. FC 바르셀로나의 캄프 누 경기장은 정말 최고였지. 몬세라트 수도원에서의 풍경은 잊을 수 없었어.' 이런 것을 기억하고 이야기하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느낌과 기억은 이후에도 이어질 수많은 여행의 풍경에 뒤섞이거나 희미해지거나 잊힐 것이다. "나 스페인 가봤어"만 남긴 채.


아이들이 기억하는 여행이 '우리 가족이 처음 떠난 유럽여행', '마드리드행 비행기표를 처음 봤을 때의 그 흥분과 당황스러움', '여행지에서 느꼈던 가족의 따뜻함', '마음의 주파수가 내내 맞았던 여행', '서툴지만 잘 해낸 스페인 여행'으로 기억되기를 나는 바란다.




아내와 단둘이서 성큼성큼 걷는 어른의 여행이라면 더 여유로웠을 것이고 더 많은 것을 보고 왔을 것이다. 어른의 풍경으로 커피 향을 더 짙게 배겨왔거나 와인과 알코올의 풍미를 더 흠뻑 내뱉어내는 여행이었을 것이다. 아이들과 함께한 여행은 느렸고 서둘러야 했고 갈 수 있는 곳도 적었다.


그럼에도 '여행자의 마음'을 함께 나눈 이 여행이야말로 아이들이 자라고 성인이 되어서 떠날 여행의 디딤돌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이들이 떠날 앞으로의 여행이 스케줄과 봐야 할 것과 맛보아야 할 것으로 채워질 여행이 아니라 '챙겨 올 마음'으로 가득 채워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렇게 우리 가족의 첫 유럽여행이자 스페인 여행이고 엄마, 아빠의 엉뚱한 이벤트로 시작한 여행은 '챙겨 올 마음의 빈자리'만 가득한 여정이었다.



                                            

대단한 무언가를 보기 위해 떠나온 것이 아니다.  어쩌면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아무것도 아니지 않게 여기게 되는 그 마음을 만나기 위해 떠나온 것이다. - 모든 요일의 여행, 김민철 -




                                                        

Continue : 2화 비 오는 솔 광장에 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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