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시작, 마음의 주파수를 맞추다.
여행의 시작, 마음의 주파수를 맞추다
해외여행을 가면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일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낯선 곳에 가서 지정된 곳에 정확하게 점을 하나 찍는 것. 바로 숙소에 도착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확실한 점을 하나 찍어 두고 오가는 길을 익히고 나면, 점은 선으로 연결되고 선은 면이 되어 면과 면이 붙어가며 넓혀집니다. 여행자가 여행지에 익숙해져가는 방식입니다.
여행지에서 중요한 또 한가지는 함께 간 동반자와 마음의 주파수를 맞추는 일입니다. 그간 몇번의 여행이 제게 남긴 교훈이기도 합니다. 여행에서는 서로의 마음이 날카롭거든요. 평소의 마음 관계와는 다릅니다. 낯선 곳에 가니 예민해지고 민감해지는 것인데 이것을 헤아리지 못했다가 제 마음이 베이고 제 마음의 칼날에 식구들이 베이기도 했습니다.
이번에는 단단히 마음먹었습니다. 시간을 재촉하지 않고 아이들에게 어른처럼 행동하기를 바라지 않기로 말이죠. 다만, 미리 아이들에게도, 아내에게도 부탁했습니다. 조금 더 배려하고 이해하는 여행이 되자고. 마음에 공백을 두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식구들과 마음의 주파수를 맞추는 일은 여행의 초반에 중요합니다. 일상의 흐름보다 느리게 더 느리게 기다렸습니다. 마음이 바빠 여유가 없어지고 있는건 아닌지 수시로 체크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주요한 주문을 외웠습니다.
"여행이니까 다 서툰거야. 뜻대로 다 되면 여행이 아니지. 여행이 마음대로 되는 법이란 없으니까."
헬싱키에서 두 시간을 기다린 후에 다시 세 시간을 비행하고 우리는 마드리드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지하철을 갈아타고 물어물어 도착한 솔광장역에 첫발을 내디뎠죠. 컴컴한 밤을 비추는 환한 불빛사이로 빗줄기가 선명했습니다. 우산도 없는데. 대개의 광장이 다 그렇듯 광장은 낯선 사람의 방향감각을 흐트러뜨리더군요. 어느 곳으로 가야할까.
몇 바퀴를 헤매고나니 마음이 바빠졌습니다. 배도 고프고 시차를 감안하면 서울은 새벽이고. 애들은 자야할텐데 말이죠. 이럴 때의 주문은 마음 상태의 반어법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돌아보는 재미도 있는 법이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얼마나 불안했는지요. 이거 마드리드가 우리를 반기지 않는 것은 아닐까.
내 마음을 읽은 것인지 한참을 헤매다 찾은 숙소는 딱 좋았습니다. 오래된 건물에 들어선 호스텔이 '이게 딱 스페인이야'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삐그덕거리는 낡은 건물에 들어선 깔끔한 호스텔의 그 느낌. 점 하나를 잘 찍은 느낌이 전해졌습니다.
마드리드의 골목, 일상과 여행의 어디쯤
떠나기 전 스페인 여행을 다녀 온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마드리드에서는 볼 것이 없다고들 했습니다. 대부분 반나절이나 하루정도만 들렀다가 그라나다나 세비야로 떠나야한다 하더군요. 마침 드라마 '알함브라의 궁전'은 절정을 이어가던 때였으니까요.
꼭 봐야할 무언가를 찾아 온 여행이 아니었으므로 우리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마드리드 궁전을 향해 가면서도 골목 골목 저 끝까지 시선을 훓어내고 바닥의 편석 하나 하나 밟아가며 마드리드를 느꼈습니다.
마드리드에서 보낸 우리의 여행은 계속 그랬습니다. 솔광장 바로 옆의 숙소라서 숙소를 기점으로 마요르 광장, 산미구엘 시장, 에스파냐 광장 까지 모두 걸어다닐 수 있었습니다. 지도를 펼 쳐 놓고 목적지를 하나 정하고서는 구글맵을 켰습니다. 구글맵이 정해 준 바로 가는 길은 있었지만, 우리는 발길대로 ‘이르는 길’을 택했습니다. 목적지보다 아름다운 '이르는 길'의 즐거움에 우리의 발길은 한없이 느려졌습니다.
길을 지나다 연주하는 버스킹이라도 만나면 행복했습니다. 구글이 알려주는 길을 벗어나 걷다가, 생각지도 못한 매력적인 골목을 만나거나 아기자기한 집을 구경하거나 하다못해 말도 안되는 웃음이 터져 나오면 그것은 그대로 여행의 행운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여행은 애초에 반쯤만 채워 둔 여행이었습니다. 아이들을 재촉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까닭이었지요. 아이들과 함께한 여행이 좋은 이유는 여행의 공백을 둘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공백을 활용하면 여행은 우리만의 여행으로 모습을 바꿔가며 나타납니다. 검증된 맛집도 가야할 필수코스도 의미 없고요.
쉬러 왔다면서 스케줄에 우리를 구겨넣는 무리를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 어떤 봐야할 것도 이 순간의 행복을 여기에서도 미뤄가며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굳게 마음먹은 여행이기도 했습니다.
대신, 욕심을 낸 한가지가 있었는데요,
우리가 일상에서 늘 하던 일을 여행지에서도 하는 것입니다. 골목을 걷고, 물과 과자와 마실 술을 사기 위해 마트와 시장을 알아가고, 읽지도 못하는 책을 구경하기 위해 서점에 나가보고 하는, 서울에서도 늘 하던 것을 여행에 와서 해보는 것입니다. 마침 숙소 옆에는 스페인의 대형 백화점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백화점 지하의 마트에서 시간을 오래 보냈습니다.
“여보, 이리와 봐. 이거 맥주 한 캔 값이 맞겠지? 0.5유로? 그럼, 700원꼴인데? 맥주 진짜 싸다.”
“아빠, 킨더초콜릿이 진짜 커. 이거 우리나라에는 없어. 대박이지. 사이다가 2.5리터짜리도 있어.
이거 우리 사가도 돼?”
마트에 진열된 상품하나하나는 각자의 취향대로 눈길을 잡아 끌었습니다. 우리의 그것과 비교하는 즐거움에는 ‘나 저거 꼭 먹겠음’하는 강한 의지가 숨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여행은 타인의 일상을 살아봄으로써 나의 일상의 의미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떠나봄으로써, 의지할 곳이 네 식구뿐인 이곳에서 서로의 의미를 새로이 새겨보는 것이지요.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특별한 일상이 되는 여행은 계속되었습니다.
너무나 서툴러서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버젓이 저지르는 자신을 견뎌야 한다.
여행자란 바로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다.
...
그리고 너무나 서툴러서 태연하게 황당한 실수를 저지르는 자신을 감당해야 한다.
만약 그게 힘들다면,
당장 여행을 포기하는 수 밖에.
물론 예외는 있다.
잘 짜인 패키지 관광을 떠나는 방법도 있지만.
여행은 그렇다 치고, 그게 인생이라면 어떨까. 이번 여행지에서는 이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보자.
「언젠가, 아마도」. 김연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