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입에서 분리-개별화의 과정, 그 결과는?
25년도 심리실이 열렸다. 올해도 열두 명의 아이들과 함께 하게 되었다. 한해 한해 갈수록 벌어지는 나이 차 때문인지 한 명 한 명의 아이들이 꽤 진심으로 귀여워 보인다. 몇 해 전 개인적으로나 직업적으로나 이런저런 과도기적 시기를 지나고 있을 때 슈퍼비전이나 교육을 하는 것이 버겁게 느껴졌다. 그러나 어느덧 쌓인 연차 때문인지, 넓어진 마음의 여유 공간 때문인지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살펴보는 마음에도 이들을 좀 더 잘, 자세히 들여다보려는 각오가 생긴다. 마음에 더 많이 담고, 더 많이 내어 주고 싶다.
심리실 실습을 시작하는 이들은 보통 이 세계(임상심리)에 대한 모든 것이 처음이다. 그야말로 첫인상을 형성하고 첫 경험을 하게 되는 샘이다. 심리학을 공부하다 보면 어떤 것에 대한 첫인상을 형성하는 것이 향후 그 사람의 사고와 감정과 행동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전공책을 통해 문자적으로만 알던 그 모든 것에 대한 첫인상을 형성하게 되는 중요한 경험을 이 공간에서 하게 되었음에 남다른 책임감을 느낀다. 아이들은 일과 환자를 대하는 나의 태도와 마음가짐, 말투 등이 얼마나 훌륭한지 아닌지와는 관계없이 은연중에 '아 저렇게 하는 거구나' 하며 내 것을 흡수할게 뻔하기 때문이다(내가 그랬듯). 그렇다 보니 내가 좋은 표본인지 아닌지를 신경 쓰며 평소보다 내 언행을 더 검열하게 되고, 긴장해야 한다는 사실이 어느 시점에는 불편하게 느껴졌던 것도 같다.
운이 좋게도 나는 임상심리학자로서 훌륭한 표본이 될 수 있는 분들께 가르침 받았다. 일과 환자를 대하는 선생님들의 태도와 마음가짐, 말투 등은 어느덧 내 안에도 깊숙이 배었다. 이는 심리학에서 함입(introjection)이라는 방어기제 개념에 빗대어 설명해 볼 수 있겠다. 함입은 타인의 감정, 사고, 태도 등을 비판 없이 내면화하여 자기 것으로 삼는 심리적 기제로, 특히 중요한 타인에게서 영향을 받을 때 자주 나타난다. 나는 선생님들께서 일과 환자를 대하는 태도, 마음가짐 등을 성실히 받아들였다(함입). 그러다 보니 어느덧 전문가는 되었지만, 어느 순간에 다다르자 분리-개별화(Separation-Individuation)에는 빨간불이 켜졌다. 즉, 나와 타인(선생님) 목소리 사이의 경계가 희미해졌고, 때때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선생님)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것 같은 이질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어떤 게 진짜 나일까' 하는 고민이 이 포인트에서도 시작된 거다. 내 목소리를 찾아야만 할 것 같았다. 내가 선생님들로부터 흡수한 것들을 소화하고, 나만의 방식으로 체화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내 목소리를 찾으리라' 결심한 이후에도, 갈등은 지속되었다. 특히 나는 '친근감'과 '카리스마'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 어려웠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많은 관계에서 친근한 쪽의 역할에 훨씬 더 익숙한 사람이다. 한편으로, 나는 카리스마와는 완전히 거리가 먼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흡수한 선생님의 모습은 강압적이지 않았지만 카리스마가 있었다. 나는 단호함과 엄격함이 필요한 순간에 '내가 아닌 것처럼, 즉, 선생님처럼' 말을 해댔다. 그러나 그럴수록 아이들과 거리감이 생기는 게 서운했고, 왜인지 나 자신이 이질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또 어느 때는 보통의 관계에서처럼 친근한 모습을 내비치자, 그런 식으로 점차 깊어진 유대관계 속에서 나는 바른말을 할 때 마다 꼭 마음에 힘을 더 실어야만 했다. '이것도 나고, 저것도 내가 맞긴 한데, 왜 이렇게 뭐가 다 불편할까?'. 이 지점에서 친근감 대 카리스마 사이의 내적 갈등은 더 깊어졌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지금의 결론에 도달했다.
이 공간(임상심리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후배들에게 임상심리학의 첫 실전 경험을 통해 직업적 자아의 기초 개념을 잘 다질 수 있도록 돕는 일(카리스마가 필요한 일)이고, 그 후순위가 친근감이라는 결론. 설령 두 번째(친근감)가 잘 취해지지 않더라도, 첫 번째(직업적 자아로서의 첫인상)가 잘 취해진다면 이곳(임상심리실)에서 만큼은 그것으로 대 성공인 거라고. 이 결심을 한 이후에 나는 엄격함과 단호함이 필요로 하는 순간에 조금 더 내식대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고, 그 목소리에 점차 익숙해지는 중이다. 그리고 의도치 않아도 그 사이사이 빈틈에 다정함과 애정은 자연히 묻어나게 마련일 거라 믿어본다.
그렇게 나는 2학년 5반 심리실 '담임'이 되어 보고자 결심했다. 부디 이곳에서 만나게 되는 이들 각각의 잠재력을 알아보길, 그리고 이들이 1년의 ‘첫’ 경험을 거름 삼아 이 세계로의 첫 발을 잘 내딛고, 자신만의 꽃을 피울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 해 동안 이들의 담임쌤이 되어 보리라는 은밀한 다짐을 해 본다. 이미 수년간 해온 일이었지만, 올해는 이 글을 작성함으로써 그 의미와 실천 행동의 방향성이 더 명료해졌다. 가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