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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린 Dec 25. 2023

느슨하고 가볍게

본 여행 | 마르쉐와 와이너리

침대에 앉아 14세기 지어진 성벽에 재생되는 거대한 영상을 보면서 쓰고 있다. 창문 밖으로 신, 선과 악, 그리고 인간에 대한 영상이 압도적인 규모로 펼쳐진다.


이례적인 일이다. 좋은 위치와 시설의 숙소를 싸게 구했다. 창밖으로 본beaune의 상징인 호텔디유가 한 눈에 보인다. 구할 때는, 미디어 영상이 밤에 상영되는지 조차 몰랐다. 프랑스의 겨울밤은 오후 4~5시부터 시작된다. 긴긴밤을 위로하듯 많은 역사적 장소에서 불빛 축제를 하는데, 이걸 따뜻한 방에서 볼 수 있다니, 볼 생각도 없었지만 괜시리 돈 번 기분이다.

 


이번 여행 출발 전 탐탁치 않은 순간이 많았다. 아기가 클수록 여행이 힘들어져서 가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최근 살 게 많아서 월급이 모자라 월말에는 보릿 고개처럼 먹고 싶은 것도 미뤄야 하는 일이 많았다. 살림이 빠듯하니 숙소비, 외식비도 부담이다. 하지만, 가장 큰 부담은 에너지가 넘치는 14개월 아기를 데리고 파리부터 마르세이유까지 789km를 달려야 한다는 점이다. 비행기를 타면 되지 않냐고 생각하지만, 기름값과 고속도로 비용 보다 비행기값은 훨씬 비싸다. 게다가, 겨울에 아기 짐까지 싸서 비행기를 타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강력한, 실로 강경한 의지 때문에 떠났다. 여행에 이렇게까지 진심일 일인가? 하고 화도 냈지만, 져주기로 했다. 팔꿈치가 욱신거리지만 좀 더 많이 부지런히 움직이기로 했다.


차 안에서 아기의 울고불고 하는 일, 똥 싸서 추운 곳에서 갈아야 하는 일이 미리 걱정이지만, 그래도 넉넉하게 짐을 챙겨서 차에 싣고 여기저기 다니는 편이 비행기보다 그나마 더 낫다.  

프랑스 남부에서 차로 여기저기 다니는 매력이 있어 이걸 포기하기도 어렵다. 하루에 다 가기 힘드니, 중간 지점인 본에서 이틀을 머물렀다.


출발 전에는 잊고 있었지만, 여행이란 일상의 부재가 주는 신비로움을 품고 있다. 기대하지 않았던 풍경과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교류, 새로운 상황에서 생각하게 되는 나도 몰랐던 나의 색다른 접근법까지.   




1.

토요일마다 본 시내에 열리는 마르쉐marche는 꼭 가볼 만 하다. 규모도 꽤 크고 과일, 꿀, 치즈, 통닭구이poulet roti, 꽃, 생선 등 아주 다양하고 신선한 식재료도 살 수 있다. 가게들이 많으니 단골이 아니고서야 어디가 맛있는지 알기 어렵다. 그래서 시식코너를 적극 활용하면 좋고, 없더라도 먹어볼께요goût 라고 하면 흔쾌히 준다.


우리는 소시송과 치즈를 샀는데, 치즈 가게 아저씨가 인상적이다. 10살 정도로 보이는 아들과 치즈를 팔고 있었다. 우리에게 가장 비싼 치즈beauport를 권했는데, 남편이 그 치즈를 마음에 들어했다. 게다가 남편은 꼼떼comte도 먹고 싶어했다. 나는 치즈를 그다지 많이 먹지 않지만, 원만한 결혼생활을 위해서는 상대방의 모습 그대로를 ‘수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조언에 따라 각각 100그램 정도 사겠다고 했다.


아이 아버지는 조금 크게 자르는 것 같았다. 백그람보다 큰데? 라고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불어가 짧으니 어쩔 수 없이 지켜봤다. 아니나 다를까, 40유로나 나왔다. 이 사람이 각각 200그램보다 더 크게 자른거다. 짜증이 살짝 몰려왔지만, 아이 얼굴을 보니 그래 뭐 좀 더 먹으면 돼지, 라고 넓은 마음이 절로 생겼다. 아이, 너도 아빠 돕는 보람이 있는 하루여야지.


나는 1유로도 허투루 쓰지 않는 빡빡한 사람이지만, 낯선 곳에서의 이런 경험은 새로운 생각의 나를 끌어내기도 한다.



2.

1700년대부터 시작한 본의 와이너리 Patriarche는 5km에 달하는 동굴cave을 와인 저장고로 쓰고 있고, 1904년 산 와인도 판매한다. 유서깊은 곳이다. 20유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 6잔 시음할 수 있다. 컴컴하고 쿰쿰한 와인셀러는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참새방앗간이자, 한 번 매료되면 와인을 한가득 사지 않을 수 없는 개미지옥이다.



왠만하면 사지 않는다, 라는 게 나의 신조다. 정반대로 남편은 인생 한 번이니 가능하면 사고 싶은 건 다 산다라는 마음으로 살고, 산다. 빚만 남으면 어쩌냐는 나의 걱정에 애들은 상속포기하고 스스로 살아가면 된다고 한다.


발상에는 무게가 없다더니. 마르쉐에서 식재료 쇼핑 직후, 오후에 방문한 와이너리에서 남편은 30병의 와인을 집으로 배달시키는 기염을 토했다. 차에 실은 것도 6병 있으니 6종류 와인 36병을 단 3시간만에 구매한 셈이다.

2020년산 화이트 4병, 2020년산 샹베르텡 레드 6병, 상트니 18년산 4병, 뉘상조지 풀렛 20년산 4병, 마코니 4병, 크레망 14병.

*그렇다. 우리는 발란스가 좋고 날씨도 딱 좋았다는 20년산 와인을 좋아한다.


프랑스에서 5유로 이상하는 와인이면 대충 먹을 만 하다고 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많이 마시다 보면 비싼 와인이 맛있구나! 하는 자본주의의 평범한 진리를 혀끝부터 깨닫게 된다. 그렇다고 20-80유로 하는 것들을 서른병씩 사쟁여놓고 싶은 건 절대 아니었다. 나는 돈 쓰는 일에 알레르기가 있고, 불안정함을 선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주장에 동조하여 온 여행지에서, 본인의 마이너스 통장에서 돈을 빼서 와인을 사가고 싶다는 굳은 심지에 내 주장은 잠시 접었다.


여행지에서 나는 내키는대로,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되는대로, 그럭저럭 살기로 했다. 좋은 일도 아니고, 나쁜 일도 아니다. 그저 여행지에서는 빡빡한 자아를 내려놓고, 깊은 동굴에 숨어있던 여유있는 자아를 발견하고 먼지도 털고 닦은 후 꺼내놓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느슨해지는 것도 좋은 일이다. 나는 원래부터 이렇게 상황과 배경에 따라 생각을 바꾸는 가벼운 존재였으니, 여행을 한다는 것은 대면하고 싶지 않은 자아도 만나고, 나라고 믿고 있던 나를 내려놓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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