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에 입학할 때부터 2학년 9월 중순까지 대구에서 자랐다. 대구에서도 그리 복잡하지 않은 곳에 살았다. 하교한 뒤 저녁 먹기 전까지가 가장 신나는 시간이었다. 집 근처 잔디밭에 (존재하지도 않는) 보물찾기를 하거나, 잠자리채를 들고 나서선 각종 곤충들을 잡아들였다. 잠자리는 겹눈이라 그런지, 쉽게 잡혀주지 않았다. 중닭까지 키워보지도 못했지만, 학교앞에서 파는 병아리를 계속 사서 이렇게 저렇게 하루라도 더 살려보려고 애쓰기도 했다. 하루는 참새가 실수로 집에 난입했다. 어딘가를 다쳤는지, 참새는 종종 걸음만 할 뿐 집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흥부라도 되어볼량 어떻게라도 도와주고 싶었지만, 내 손아귀에 순순히 잡혀주진 않았다. 그저 여기저기 총총 거리며 다닐 뿐이었다. 밥이라도 먹어라, 하는 생각에 과학 준비물로 갖고 있던 샬렛에 물과 엄마가 준 황차조를 담아서 줬다. 그 뒤로 삼사일 간, 참새가 아직도 집에 있는지, 차려준 물과 곡식을 먹었는지 보러 오는 낙에, 쏜살같이 집으로 달려오곤 했다. 그 조그만한 새가 고개를 갸우뚱 거리거나 총총 뛰는 모습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다리는 사람처럼 두 개인데, 한 다리씩 움직이지 않고, 발톱으로 바닥을 튕기면서 꼭 두 다리를 같이 움직이며 통통거렸다. 곡기 덕분인지 기력을 회복한 참새는 며칠 뒤 열어둔 창문을 통해 후루룩 날아갔다. 더 이상 보이질 않았다. 물과 황차조를 공으로 얻어먹은 참새는, 박씨 따위는 들어본 적 없다는 듯 빈 손으로 떠났다.
2학년 2학기, 서울로 전학을 오면서 자연 탐사의 시간은 일단락되었다. 신문과 공중파 방송 말고는 세상 소식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던 시기였다. 덕분에 서울 깍쟁이들에 대한 선입견이 없었지만, 동시에 서울 아이들이 (당시에도)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는지에 대한 정보도 없었다. 잠자리채를 오른 어깨에 척 걸쳐메고 쏘다니다가, 졸지에 책상 앞에 앉아서 제발 숙제라도 하라는 엄마의 명령을 들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책상 앞에 앉으면 그렇게 잠이 왔다. 2층에 살았었는데, 잠이 솔솔 올라치면 친구들이 창문 밖에서 때마침 불러줬다. 고무줄 놀이 하자! 그럼, 나는 엄마에게 잠깐만 놀다 올께, 하고는 땅따먹기까지 야물딱지게 끝낸 뒤에야 돌아오기 일쑤였다. 한동안 엄마는 그런 나를 지켜봐 주었다. 서울에서의 첫 중간고사가 끝난 뒤, 시험지에 빨간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것을 본 엄마는 잠자리채보다 두꺼운 진공청소기 원통을 뽑아들고 외쳤다. 공부해!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공부로부터 멀어질 수 있을 만큼 멀어지기 시작한 때가. 장장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 끝날 때까지 부러 책을 멀리하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비모범적인 행동에도 앞장섰다. 앞머리에 스프레이를 뿌려 말아서 고정시키거나, 학교별 비공식 대항전이 있으면 기꺼이 참전해서 기합소리 좀 뿜어주기도 했다. 공원에서 남학생들을 관찰하며 주변을 기웃거리기도 하고, 학원비를 옷값으로 탕진하기도 했다. 교무실에 불려가 벌을 서는 일도 잦았고, 문제아라고 수근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삶의 태도가 하루 아침에 변하는 일은 거의 없다. 불을 피울 때처럼 부싯돌을 부딪치고, 불길이 사그러지지 않도록 약한 바람도 불어주고, 강한 바람은 막아주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제서야 불은 활활 타올라 고기를 굽거나 추위를 피할 수 있다. 잘 타는 소재도 주변에 배치해서, 촉매 역할을 해야 하기도 하다. 그렇게 하나씩 섬세하고도 지루한 과정을 거쳐야 나무가 재가 되듯 다른 물성이 된다.
멋 부리는 것만 좋아하던 나를 조용히 지켜보던 아빠가 중학교 교지에 글을 하나 실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내면에 있다는 요지의 글이었다.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고루한 이야기를 굳이 우리 학교 교지에까지 싣는 아빠가 부끄러웠다. 아니나 다를까. 교지가 각 반에 나눠지던 날, 같이 놀던 친구들과 나 같은 문제아를 멀리하던 아이들 모두 각기 달려와 물었다. 너네 아빠 맞아? 너 혼났어? 반응도 각양각색이었다. 대부분의 반응들은 음성으로만 남아있는데, 단 한 명의 친구는 내 눈을 보고 이렇게 물었고, 생생히 기억난다. 너희 아빠는 이런 글도 쓰시는데, 너는 왜 그래?
별로 친하지도 않은 아이였는데, 내가 왜 쟤한테까지 혼이 나야 하는지 괜히 당한 것 같고 기분도 나빴다.
결정적인 촉매제는 변화를 앞당기기도 하다.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나에 대한 나쁜 인상을 단단히 갖고 있었다. 어느 날, 내 앞에 앉은 친구가 발표를 하러 단상 앞으로 나갔고, 그 선생님은 내 앞에 앉아있었다. 갑자기, 선생님은 본인 머리 카락에 붙은, 누군가 씹던 껌을 발견했다. 그리곤 바로 뒤에 앉아있던 내가 그 껌을 본인 머리에 붙였다고 생각했다. 나는 살면서 껌을 좋아아해본 적이 없다. 어릴 때는, 씹다가 뱉어야 하고 싸서 버릴 종이도 갖고 있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는데, 왜 씹지? 라고 생각했었고, 커서는 턱 근육이 커져서 얼굴이 네모낳게 될까봐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제가 그런게 아닌데요", 라고 말해봐야 소용이 없었다. 이미 그 사람에게 범인은 나였다. 1m 정도 되는 길다란 막대를 늘 들고다니는 사람이었는데, 그 날, 그 교실에서 그 막대기로 얼마나 많이 맞았는지 모른다. 이마가 벌겋고 퍼렇게 부풀어 올랐고, 허벅지와 팔도 막대 자국이 선명했다. 니 엄마아빠가 그렇게 가르치디? 폭력과 막말은 쉴새없이 같이 날아들었다.
집에 와서 간단히 설명하고 눈물만 뚝뚝 흘리는 나를 두고 엄마아빠는 간장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을 것이다. 말썽은 피워도 남에게 피해를 주진 않는 아이었는데 말이다.
한동안 축 쳐져서 학교를 다녔다. 내가 한 일이 아닌 것으로 모두 앞에서 혼난 것도 수치스럽고, 맞은 곳이 쉬 가라앉지도 않았다. 나 때문에 엄마아빠에게 근심걱정을 하게 한 것도 속상했다. 하루는 이렇게 오해받고 사느니 죽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같은 반 친구 세 명에게 얘기해, 내가 죽으면 다 그 선생님 때문이라고 해주고, 엄마아빠에게는 미안하다고 전해달라고 했다. 하교 후, 우리는 다 같이 고층 아파트로 향했다. 11층까지 올라갔다. 항변하고 싶었지, 세상에 죽을 일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레베이터가 고장나면 좋겠다, 생각도 했었다. 아무 문제없이 몇 초만에 올라왔고, 복도식 아파트의 난간에서 나는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난간을 손으로 잡고 살짝 뛰어서 배를 난간에 기대 보았다. 너무 무서웠다. 엄마아빠가 슬퍼할 모습이 떠올랐다. 결정적으로, 내가 잘못한 게 없는데 내가 왜 죽어. 살아서, 복수한다. 생각으로 다시 엘레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다. 그날 저녁 집에서 저녁을 냠냠 먹고, 다음 날 부터 다시 씩씩하게 학교를 다녔다.
그 해 겨울, 몇 번의 더 소소하게 자존심을 다치는 일들이 있었다. 엄마는 과외비를 아낀다며 공부를 잘 하던 여동생과 나를 같은 선생님에게 동시에 배우도록 했다. 내가 멋있다고 생각한 친구가 특목고를 간다고 해서, 나도 갈래! 했는데, 모두들 너는 성적이 안될 것 같은데라고 비웃었던 일도 있었다. 그렇게 몇 번의 균열을 더 거친 후에야, 나는 비모범의 탈을 벗고, 평균적인 학생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180도 달라지길 바랄 때가 있다. 그런 바람은 보통 간절하다. 변하지 않으면 내가 못 견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어떤 변화도 하루 아침에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아닌 타인이 인생을 어떻게 바라보고, 하루를 어찌 살아가고 있는지 알 도리도 없다. 사샤 케이건은 스스로를 개선하기 위해 애쓰는 것은 추상적으로만 좋은 일이 아니고 진화상 막대한 이득이 있는 행위라고 한다. 그러니 큰 방향성을 정해두고, 우리가 사랑하는 그 타인에게 이득에 대해서 부드럽게 그러나 지속적으로 알려주고, 오늘 하루를 그 방향을 향해 딱 하루치 만큼의 걸음을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