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신의 <오르막길> 가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이제부터 웃음기 사라질 거야. 가파른 이 길을 좀 봐. 그래 오르기 전에. 미소를 기억해두자. 오랫동안 못 볼지 몰라".
무언가를 얻기 위해 또는 이루기 위해 가는 길은 오르막길을 가는 것과 비슷하다. 웃지도 못하고 발이 부르트도록 한 걸음씩 옮겨서 겨우 정상에 오른다. 기가 막힌 것은, 겨우 올라갔는데, 충분히 머무른 것 같지 않아도 내려와야 하는 순간이 예상보다 빨리 올 수도 있다는 점이다.
제주도에서 노젓는 배를 탔던 날이 생각났다. 열심히 노를 저어서 해안가에서 50m가량 나아갔고, 여유를 즐기기에 적당한 거리인 것 같아 노젓기를 잠시 쉬었다. 바닷 바람, 여름 햇살과 맑고 푸른 제주 바다를 만끽했다. 내 느낌에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해안가로 다시 돌아와 있었다.
아니, 이게 뭐야. 겨우 노를 저어 나아갔는데, 또 다시 힘들게 노를 저어서 나아가야 하잖아.
노를 젓지 않았을 때 어떻게 되는지도 봤다. 해류에 의해서 다시 역시나 해안가로 밀려나 있었다. 참치나 방어를 잡겠다는 대단한 목표도 아니었다. 그저, 조금 나아가 해변을 바라보며 바다 위에 떠있는 것을 즐기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노젓기를 멈추는 순간 주변의 힘에 의해 내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정처없이 흘러가는 것이다. 원점으로 떠밀려 가면서 생각했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부지런히 노를 저어야 한다.
해류처럼, 내 주위 환경과 타인들이 만들어내는 외부요인은 끊임없이 돌아간다. 내가 약간 노력했다고 해서 그 노력이 오래 유지되는 세상은 지났다. 노 젓기를 중단하면, 다시 출발점(또는 목적지가 아닌 어느 낯선 곳)으로 되돌아가 있을 뿐이다.
가고 싶은 방향을 정해야 한다.
왼쪽으로 가고 싶으면 오른쪽의 물살을 거슬러야 하고, 직선으로 가고 싶다면 오른쪽 왼쪽 분주하게 리듬감 있게 노를 저어야 S자를 그리며 직선방향으로 간다. 갈지자처럼 보일지라도 맞는 방향의 노력을 하면, 결국엔 의도한 방향으로 간다. 그러려면, 노젓는 방법을 정확히 배워야 하고, 어느 방향으로 가고 싶은지 정해야 한다. 가다가 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꼭 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역시나, 엉뚱한 곳에 도착해있거나, 한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거나, 힘 빠지게 다시 출발점에 서있을 것이다.
다만, 그 방향이 올라가든 내려가든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상관없다.
즉, 타인의 시선은 결국엔 크게 중요하지 않다. 내가 가고자 한 방향이 있을 뿐이다.
노를 저어야만 앞으로 나가는 작은 배에서, 선장도 나고 책임도 내가 진다. 나 말고는 가족이라 하더라도 제 3자이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배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어디로 가든, 칭찬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비웃는 사람들도 늘 있다. 어떻든 간에 그들은 배 바깥에서 구경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나 대신 노를 저어주지 않는다. 그러니,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에 진심을 다하면, 그걸로 족하다. 남들의 시선은 내 것이 아니니 남들의 것으로 남겨두면 된다.
시드니의 타워에서 해가 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본 날이 있다. 곧 사라질 것을 알았는지, 강한 빛을 잠시 내는가 싶더니, 몇 분 만에 해는 똑 떨어졌고, 어둑어둑해졌다. 갑자기 사라진 것 같았다.
하지만, 해가 뜰 때는 느리다고 느꼈다. 저 멀리서 어스름히 태양 빛이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온 세상에 밝아지기까지는 몇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해가 뜨고 지는 모습이 꼭 인생과 닮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컴컴한 어둠과 쌀쌀한 새벽을 지나, 나만의 빛으로 겨우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는데, 나이가 들고 사회에서의 쓸모가 다 하면 순식간에 지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때로는, 지치고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때도 있다.
하지만, 아니다, 그럴 필요가 없다.
올라가는 그 길을 즐기고, 정상까지 가지 않더라도 가는 발걸음마다 의미를 두는 게 더 낫다. 땀이 나서 성질을 내기 보단, 땀이 나서 건강해졌다고 생각하는 쪽이 낫다. 엄청난 대어를 잡으러 노를 젓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바닷바람 맞는 것을 좋아할 수 있다면, 그리고, 나 자신으로 살 수 있는 것에 큰 가치를 둔다면. 그럼, 되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