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아버지는 무학(無學)

by 해린

올해로 92세인 큰아버지는 학교에 다닌 적이 없다. 동네 훈장이셨던 할아버지로부터 천자문을 익힌 것이 배움의 전부라고 했다. 학생들이 하늘 천 따지를 배우고 쌀 한줌 또는 됫박 정도 놓고 가던 시절이었으니, 재물 구경은 할래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어릴 적 한국전쟁을 겪고, 학교에도 다닐 수 없었던 큰아버지는 되는 대로 일을 하며 평생을 어렵게 사셨다. 어린 시절 나는, 명절 때마다 큰아버지 댁에 갔었고, 그래서 가난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가난이란 단어는 무겁다. 하지만, 인터넷이 없던 어린 시절에는 큰 부자를 볼 일도, 구경할 일도, 만날 일도 없었기에, 가난도 그렇게 지독해 보이진 않았다. 생활이 매우 불편할 뿐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미세먼지, 지구 온난화가 없던 그 시절, 추석이 되면 갑자기 날씨가 그렇게 쌀쌀해지곤 했다. 추운 것을 유독 못 참던 어린 시절, 얇은 창호지 밖에서 들어오는 그 초가을 바람이 얼마나 추웠는지 모른다. 구정 때는 말도 못한다. 큰어머니는 정성껏 틀은 솜 이불을 주시곤 했는데, 큰 집에 있는 내내 그 이불 속에 쏙 들어가서 얼굴만 내놓고 있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식이었다. 장녀가 저렇게 게을러서 어떻하냐고 걱정하는 어른들의 혀 끌끌차는 소리도 몇 번 들었다. 그래도, 추운 것 보단 욕 먹는 게 나았다.

큰아버지 댁 화장실은 재래식, 이른바 푸세식이었다. 주기적으로 누군가 와서 배설물을 치워 간다고 했다. 푸세식 화장실은,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가야 했다. 민속촌에나 있을 법한 모습을 한 그 화장실은, 흙더미로 벽을 쌓았고 지푸라기가 지붕 역할을 했었다. 기능만 겨우 남은 그 허술한 화장실 앞에 당도하여 노끈으로 된 문고리를 열면, 바닥에 구멍만 덩그러니 있었다. 어린 시절, 그 구멍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어떤 아이가 그 구멍에 빠졌는데 똥독이 올라 죽었다는 둥, 제주도에 가면 그 구멍 안에 돼지들이 살고 그 돼지들을 똥돼지라고 부른다는 둥. 밤에 화장실을 가면 귀신이 따라온다는 둥. 갖가지 소문들이 있었고, 그걸 곧이곧대로 믿던 나이였다. 갈 때 마다 그 구멍 속으로 빠지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다. 하루는 그 구멍 안이 너무 궁금해서 이리저리 고개를 움직이면서 관찰한 적도 있다. 그냥 깜깜하기만 했다. 깊이도, 넓이도 가늠이 안되니, 더 무서웠다. 밤에 소변이라도 마려우면 정말 죽을 맛이었다. 전등이라는 것이 있을리가 없었다. 동생들은 그런 위급한 상황에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엄마한테 같이 가줘야 한다고 징징대기도 했지만, 차례상에 종일 시달린 엄마는 잘도 잤다. 왠만하면 자기 전에 물을 마시지 않았지만, 한 두번 도저히 견딜 수 없던 밤이 있었다. 칠흙같은 밤, 달빛에만 의존해서 그 무서운 구멍을 피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었다. 밤도깨비 마냥, 나는 어디 대충 흙바닥에서 해결을 하고 방으로 후다닥 돌아갔었다. 물론 강아지처럼, 일을 본 자리는 다른 흙으로 잘 덮어 두었다.


1990년대에 이러했으니, 찢어지게 가난했다는 큰아버지와 아버지의 어린 시절은, 듣고도 믿기지 않을 지경이다.


먹는 흙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날이면, 아버지는 그 횡재를 놓치지 않고 친구와 함께 달려가서 먹었다고 한다. 무슨 맛으로, 뭘 믿고 먹냐고 했지만, 아버지는 시절이 그러했다고 했다. 심지어 당시 그렇게 흙을 파먹어서 지금 면역력이 좋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살면서 배가 아팠던 적은 거의 없다고 말이다. 미생물 천지인 먹는 흙 덕분에 소화기관이 튼튼해졌다는 미화된 과거를 시작으로, 아버지의 가난한 어린 시절을 더 들어보았다.


지붕이 쓰러져가던 집에 살던 4남매(큰아버지, 큰 고모, 작은 고모, 아빠)는 학교 갈 돈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작은 고모와 아빠는 육성회비를 면제받을 수 있다고 하여, 겨우 국민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고 한다. 형편이 어려우면, 여자부터 공부를 안 시키던 시대였으나, 편도 4km를 오가야 하는 국민학교에 어린 아빠만 보내는 것이 걱정되어, 작은 고모까지 엉겁결에 국민학교를 마쳤다고 한다. 사정이 이러니 아빠는 당연히 중학교는 못 가는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


이런 처지에 무슨 공부는 공부. 아빠는 안했다고 한다. 산에 땔감용 나무 가지를 주으러 가거나, 들판을 하릴없이 쏘다녔다고 한다. 하루는 친구네 집에 놀러갔는데, 그 집에는 공부하는 책상과 의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날 아빠는 책상과 의자라는 것을 처음 봤다고 했다. 그 친구는 심지어 전과라는 것을 가지고 공부를 했는데, 아빠는 그게 뭔지 궁금해서 그냥 몇 장 넘겨 봤다고 한다. 곧이은 시험에 그 친구보다 아빠의 성적은 훨씬 우수하게 나와버렸다고 한다.


아빠는 다시는 그 집에 초대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 작은 성공 경험으로 아빠는 하면 할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당시, 우리 나라가 조금씩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교육에 대한 인식도 바뀌기 시작했다. 큰아버지는 동생(아빠)공부를 더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셨다. 할아버지는 반대하셨다고 한다. 가진 것이 없는데 무슨 공부냐고. 하지만, 큰아버지가 책임지겠다고 하여 아빠는 집안에서 처음으로 중학교에 진학을 했다. 무슨 배짱이었을까. 아빠는 1등 학교가 아니면 안 간다고 버텼고-당시에는 입학 시험을 보고 학교마다 등수가 있었다-, 그렇게 청주중학교에 들어갔다. 졸업 후, 취업이 잘 된다던 청주상고에 들어갔다.


아빠는 공부는 곧잘 했지만, 1등은 아니었다고 한다. 당시 청주상고에서는 매년 1명을 한국은행에 추천할 수 있었다. 취업율은 예나 지금이나 중요하니, 학교도 합격율을 높여야 했고, 아빠에게 다른 은행에 지원하라고 권했다. 하지만, 아빠는 한국은행을 가고 싶었다고 한다 (이제와서 보니, 할 수 있는 것보다 조금 더 높은 목표를 설정하고 도전하는 나의 성향은 아빠에게서 이어 받은 것 같다).

학교의 추천을 받아야만 지원을 할 수 있던 터라, 그 추천을 결정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봤다고 한다. 바로, 교감선생님이었고, 아빠와 큰 아버지는 수박 한 덩어리를 사서 선생님 집으로 찾아갔다고 한다. 어떻게 붙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가고 싶으니 추천서를 써달라고 졸랐단다 (막무가내 전략이 늘 통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말의 가능성과 불타는 열정은 가끔씩 힘을 발휘한다).

이야기를 듣던 교감 선생님은 큰아버지에게 내기를 권했다고 한다. 아빠가 붙으면 본인이 큰아버지에게 술을 사고, 반대의 경우는 큰아버지가 사기로. 아빠는 추천을 받았고, 합격을 했다. 처음 발령 받은 곳은 출납부. 시중은행은 얼마 이상의 현금을 보유할 수 없고, 여분의 현금은 한국은행에 맡겨야 했기 때문에, 그 돈에 대한 입출금을 맡았다고 한다.


은행을 다니면서 받은 월급으로 아빠는 야간 대학교를 다니기 시작했고, 거기서 엄마를 만났다고 한다. 여자는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외증조 할아버지를 거역하고, 장학금을 받아서 할아버지 몰래 안동에서 서울까지 유학을 온 엄마는 야심가였다. 집안의 지원도 없었지만, 법대를 수석으로 입학할 정도로 독하고 성실하게 공부했다. 엄마는, 아빠에게 더 안정된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고 한다. 이에, 아빠는 사법고시를 준비해서 법조인이 되었다. 한 때, 중학교도 못 갈 형편이었지만, 아빠는 칠순이 넘은 지금도 변호사로 여전히 활동하신다.


무학인 큰아버지는, 아빠에게, 우리 가족에게는 현자고 은인이다. 동생을 책임지고 보살펴주셨고 중요한 순간마다 다른 이들을 도우셨다.


평균 보다 많이 이루었을 때, 사람들은 스스로 열심히 노력했고, 본인 두뇌가 뛰어나며, 본인이 재능이 있기 때문에 이룰 수 있었다라고 생각하기 쉽다. 개인의 능력과 노력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나는 사람의 인생 8할이 운이라는 명제에 훨씬 더 공감한다. 그러니, 운이 좋았다고 생각되면 으스댈 시간에 주위를 살피고 도우면서 사는 것이 도리라고 믿는다. 온전히 내 힘으로만 이룰 수 있는 것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 결국 스스로를 행복하게 만드는 길이기도 하다.




엄마가 갑작스럽게 떠난 뒤, 수많은 조문과 위로를 받았다. 슬픔은 나누면 경감이 된다더니, 그 위로 덕분에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다른 이로부터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 실로 사람을 살리는 길이구나라는 것을 몸소 깨달았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큰아버지의 위로였다.


엄마의 부고 전화를 받으시고 큰아버지는 많이 우셨다고 한다. 늙은 나를 대신 데려가지, 왜 젊은 엄마를 먼저 데리고 가냐고.

엄마를 납골당에 모시고, 오랜만에 큰댁을 다시 찾았었다.

갈대처럼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계속 우는 나를 보며, 큰아버지는 조용히 말씀하셨다.


“이제와서 보니, 사람 사는 것이 과일 나무 같어. 어떤 과일은 꽃 피우다 떨어지고, 어떤 과일은 큰 열매를 맺고, 또 일부는 비바람에 안타깝게 떨어지고...

충분히 슬퍼하고, 때가 되면 나무처럼 살어라, 죽은 잎은 떨구고."


나는 그 자리에서 한참을 더 울었다.

슬픔은 바다같이 크다. 아무리 울고 울어도 여전히 시시때때로 엄마가 보고 싶다.


그래도, 나무들을 보면서 큰아버지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나무처럼 살어라." 여전히, 현자이자 은인이시다.


오늘도 나는 나무처럼 살려고 노력한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대로 감사하고, 해가 나는 날에는 마음껏 즐기고, 그늘을 드리워 다른 사람들을 돕고, 꽃과 열매를 맺어 나누는,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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