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너가 원하는 것을 이룰 가능성이 낮다."
이런 류의 말들을 종종 듣고 자랐고, 살아왔다. 때로는 직접적이고, 대부분은 은근했지만, 암묵적이라고 해서 모를 수 있는 건 아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 쉽고 빠르게 판단하는 것을 좋아한다. 충분히 자신의 실력을 보여준 적이 없거나 - 보여줄 기회가 없었던 것은 중요하지 않다 - 전형적인 길을 가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말 하기는 더 쉬워진다. 이런 말을 내뱉으면 진위에 상관없이 우월감을 주기에 사람들은 스스로를 위해 남에게 이런 말을 하기도 하며, 가끔은 진정 그렇게 믿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기도 한다. 물론, 이런 말을 직접적으로 하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가만히 들어보면 네가 생각하는 것은 말도 안되고 쓸데없거나 허황되니, 어차피 안 될 것이다라는 내용을 다르게 포장하여 전달하곤 한다.
프랑스에서 국제학교에 다니는 아들의 학부모 미팅 자리였다. 아들의 영어 선생님과 1:1 시간이라 그 선생님의 의견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선생님은 아들이 많은 발전을 보였고, 어제 제출한 숙제는 잘 했다는 내용을 영국식 귀족 영어로 전달했다. 나는 말없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그녀가 나에게 영어를 할 줄 아냐고 묻는다.
외국 생활을 하면서 배운 것 중 하나는, 부당한 일이 있거나 선제 공격을 당하면 그 자리에서 부드럽고 예의있게 대응해줘야 한다는 점이다. 참거나 아무 말도 안하면, 상대방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알 기회를 놓치게 된다. 또한, 동등한 인간으로 대우해줘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줄 필요가 있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되물었다. 아들이 많은 발전을 보였으니, 이제 영어와 프랑스어를 넘어 독일어나 스페인어를 제4외국어로 해도 될 것 같은데, 영어가 어느 수준이 되면 제4외국어를 해도 될까? 라고 말이다. 그녀는 현재 아들이 2.5 수준이고, 3이 확실히 되면 제4외국어를 시작하라고 추천했다.
나는 최고 레벨의 숫자가 무엇인지 물었다. 그녀는 4라고 답했다. 난 다시 물었다. 그럼 아들이 4가 되어야 제 4 외국어를 시작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솔직히 말하면'이라고 시작했다. 느낌이 좋지 않다. 그녀 생각에는 4 수준은 모국어 수준이기 때문에 너의 아들 같은 경우에는 4가 될 수 없다, 라고 단언했다. 그녀의 다급한 손짓은 일종의 우월감을 표현하는 것 같았다. 우리를 지칭할 때는 손을 작게 모으고,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들을 묘사할 때는 팔을 크게 휘둘렀다. 결론적으로 그녀의 의견은 아들이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은 단어와 구문의 수준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레벨 3이 되면 제 4 외국어를 시작할 수 있다는 근거에 대해서는 설명을 하지 않았다.
설명은 불완전했고, 앞뒤가 맞지 않았지만, 때마침, 종료음이 울렸고, 예의있는 인사를 하고 돌아섰는데 내 표정을 이미 어둡고 차가웠다. 그녀가 떠나는 내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기분은 유쾌하지 않았지만, 한 가지만 생각했다. 아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기죽으면 안되는데.
나는 이런 류의 말을 많이 들어왔다. "넌 안 돼"
언제가 처음이었을까. 처음엔 대학교 3학년 때였던다. 읽고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고, 특히 소설을 좋아해서 국어국문과에 들어갔다. 그렇지만, 마음과는 달리 그다지 특출난 학생이 아니었다. 반면, 당시 가장 친했던 친구는 학과에서 교수가 될 인재로 촉망받는 학생이었다. 그녀는 A로 난무한 성적표를 자랑하며 장학금을 놓치지 않았다. 3학년 가을이었을까. 비평론을 같이 들었다. 매우 까다롭지만 적확하고 날카로운 비평을 하는 것으로 정평이 난 교수님이 하는 수업이었다. A를 받는 학생은 거의 없었고, C가 평균이었는데, 내가 A를 받았고 그 친구는 B를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우리는 서로의 모든 과목 학점을 공유했었다. 그녀는 굉장히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너가 A를 받지? 그 뒤로도 몇 년을 더 친하게 지냈지만, 나는 그 표정이 잊혀지지 않는다. 부족한 내가 어려운 과목을 잘 해도 되나, 괜히 미안했었다.
무려 14년을 마케터로 일했는데, 충분한 맥락 설명 없이 - 설명이 가능하기나 한지, 설명을 왜 해야하는지, 지금도 의구심이 든다 - 다 뒤로하고 박사과정을 들어간다고 하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웃거나 냉소적이었다.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나쁠 필요도 없다. 그들의 시선이 나를 옭아맨다면, 안 만나면 그만이다. 하지만,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결정하기 전에 두 가지를 기억하면 도움이 된다.
하나는, 종종 타인의 (일견) 부족한 판단은 나를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 어쩌면 나 역시 부지불식간에 아무리 조심한다 해도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망언을 내뱉었던 적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반면교사로 삼으려면 꼭꼭 숨어버리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는 나의 한계를 정할 자격과 권리가 단 1초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히 아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의 한계를 정해주는 일을 즐긴다. 그런 행동은 비열하지만 소극적 우월감을 가져다주고, 못난 자신을 안심시키는 역할도 한다. 심지어 별 뜻 없이 떠오르는 대로 던지는 말일 때도 많다. 문제는 그 말을 들은 사람은 그 아무 것도 아닌 말에 따라 덜컥 한계를 지어버린다는 점이다. 저렇게 유명한/경험많은/연륜있는/지위가 높은 사람이 이렇게 말했으니 나는 안 되겠지. 나는 모자라, 실패자야, 끝났어, 라고 쉽게 단정지어 버린다. 그 말을 몇 번 들으면, 그 말에 얽매여서 점점 모든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보는 것 같을 때도 있다.
지혜롭고 괜찮은 사람들은 남에게 절대로, 함부로 훈수를 두지 않는다. 섣부른 희망도 주지 않지만, 근거없는 비방도 하지 않는다. 본인 스스로의 한계도 다 깨닫지 못하고 죽는 것이 사람이다. 게다가 비열하고 무책임한 비판주의자들은 내 인생에 일말의 관심도 없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나의 한계를 정하게 하지 말자.
누군가 우연히 던진 조약돌에 굳이 나를 정교히 갖다대서 맞을 필요가 없다. 또한, 매우 희소하지만,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의 손을 꽉 붙잡고 놓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기억하자.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진정어린 관심을 갖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러니, 상관없는 타인이 던지는 수모를 부러 겪을 필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