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파리 근교에 산다. 파리 중심가까지 차로 30분 정도 걸린다.
사람들이 혹여나 '파리'에 사는 파리지엔느라고 오해할까봐 꼭, 파리 '인근'에 산다고 강조를 한다.
그러면, 이어지는 질문들이 있다.
"그럼 그 동네 이름은 무엇이냐?" 말한다고 알기는 어려운 생소한 동네다. 그래도, 대답을 한다.
재미있는 것은, 나이가 지긋한 (40-50대) 분들은 다시 이렇게 묻는다.
"서울로 치면, 과천 같은 곳이냐?, 미국으로 치면, 뉴저지 같은 곳이고?"
네, 맞아요. 과천 주택가 같은 곳이고, 뉴저지 같이 사람들이 거주하는 분위기의 동네에요.
생각해보면, 이러한 질문은 참 재밌다.
어떤 새로운 것을 이해하고 기억하기 위해 우리는 종종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비유를 한다. 유사점에 근거해서 낯선 것을 친숙하게 만들고, 그것을 바탕으로 추론을 하기도 한다. 때론 이런 방법이 도움이 되지만, 요즘처럼 발전이 빠르고 신개념들이 매일같이 쏟아질 때는 방해가 될 때가 더 많다.
새로운 것을 완전히 받아들이려면, 그 자체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 같은 저것. 이라고 하면, 그 '이것'에 발목잡혀서 새로운 '저것'도 이것처럼 보인다. 만약, 그 '저것'이 그저 이것의 변형이라면 상관없다. 하지만, 그 '저것'이 세상을 앞으로 밀고 나갈 새로운 존재라면, 그걸 그대로 토박이 (네이티브)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네이티브(native)"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그 나라/지역을 아주 잘 아는 사람들이라 비유가 필요없다. 네이티브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본인의 경험과 관점을 가지고 대상을 해석한다. 뉴저지와 과천에서 각각 몇 년씩 살아서 다 잘 아는 사람에게, "뉴저지는 어떤 곳이야? 이를테면 과천 같은 곳인가?" 라고 하면 네이티브들은 고개를 갸웃거릴 것이다. 물론, 대도시 인근의 베드타운이라는 공통점이야 있지만, 각각이 가진 특색과 분위기를 뭉뚱거리면 고유의 특성을 읽어내기 쉽지 않다.
그래서 때로는 unlearn (학습의 해체)이 필요하다. 이는 기억을 지우는 망각이나 자연스럽게 기억이 사라지는 것과는 다르다. 오래된 틀과 익숙한 비유를 의도적으로 내려놓는 행위다. 이미 아는 것을 통해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대신, 아직 명명되지 않은 세상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기 위한 단단한 준비다. 비워낸 만큼 생겨나는 여백에서, 그 낯선 것은 스스로의 빛과 결을 드러낸다. '이것 같은 저것'이라는 그물망을 걷어내면, 비로소 '저것'이 가진 고유한 울림을 만날 수 있다.
배운 것을 다 잊자고 주창하는 것이 아니다. 익숙한 비교와 관점에 의존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새로운 것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이다. "이건 저거랑 비슷하다”라는 습관은 처음 이해할 때는 편리하지만, 결국 낡은 안경처럼 우리의 시야를 제한한다.
이러한 unlearn을 통한 파격(破格)은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진정한 창조의 시발점이 된다. 기존의 틀을 놓고 넘어선다는 것은, 무질서로 향하는 것이 아니다. 익숙한 것을 붙들지 않으려 노력하면, 세계를 새롭게 마주하는 용기도 나고, 알아봐야겠다는 의지도 생긴다. 예전의 틀을 유지한 채 새로움까지 붙들려고 하면 어색한 이음새만 남는다. 그러니, 낡은 형식은 과감하게 내려놓고, 날 것의 시선으로 응시할 때, 새로움은 온전히 제 모습으로 도래한다.
파격은 혼란이 아닌 순수한 수용의 조건이며,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시대는 바로 이러한 파격을 향한 unlearn을 요구한다. 마지막으로, "격식을 깨지 않으면 고수가 될 수 없다"는 미생의 대사를 빌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