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al & Sponge
2주 뒤에 홍콩에서 VP(Vice President)가 온다고 했다. 내가 맡은 제품과 출시 계획에 대해서 PT를 20분간 해야 한다고 했다. 국내 회사에 다니다 외국계 화장품 마케팅으로 간지 겨우 한 달 되었을 때였고, 한국 밖에서는 거주를 해본 적이 없었다. 면접 볼 때도 영어는 주로 이메일로 하면 된다고 해서 덜컥 옮겼는데 말이다.
한국에도 임원과 사장님이 다 있었는데.. 도대체 그 홍콩지사에서 온다는 그 VP가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존재인지, 하루 종일 한다는 회의에서는 뭘 준비해야 하는지.. 물어봐도 속 시원하게 대답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저 "그분이랑 회의하는 거 너무 좋아~ 크리스챤 베일 닮았는데, 내 눈을 그윽하게 바라봐주는 게 어찌나 매력적인지!" 나를 제외한 회사에 오래 다닌 분들은 이렇게 그분의 외모에 대한 칭찬만 늘어놓았다.
그래서, 옆자리 동료에게 용기 내 물었다.
"그...발표 준비 어떻게 하면 돼요? 연습도 미리 많이 해봐야 하죠?"
대답은 명쾌했다.
"우리 정도 직급은 그냥 파워포인트 보고 읽으면 돼요. 내용도 많이 넣을 필요 없고, 간단하게! 그 분은 워낙 사람이 좋아서 핵심만 짚어줘도 되더라구요."
결과적으로, 그날. 나만 보고 읽었다.
발표할 때 발표자가 읽으면, 10초 만에 모두 안다. "저 사람은 읽는구나. 청자를 설득하려는 것이 아니구나.
의지도 부족하고 굳이 들을 필요도 없겠구나."라고 생각해서 발표가 끝나도 아무도 끝났는지 모른다. 장표에 Thank you가 나올 때 까지...
더 슬픈 건, 발표자가 중간에 그걸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영어로 회의를 하고, 내 제품에 대해 중요한 논의들이 오가는 것 같았고, 나는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 알아듣는 척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도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했고, 저녁 먹으러 가기 전 후배가 "회의 어떠셨어요?"라고 물을 때 무너질 것 같았다.
지금도 선명한 것은 하루종일 영어를 들으며 세뇌당한듯한 몽환적 상태, 나의 흔들리던 마음 그리고 이젠 망했다 라는 자괴감이었다.
언어라는게 빨리 익힐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옮긴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머릿속 셈이 복잡했다.
결국, 나를 뽑았던 상사에게 바보같이 물었다.
"저 인터뷰 때 영어도 완전 버벅거렸는데 왜 뽑으셨어요..."
"응, 괜찮아. 영어는 와서 하면 돼거든!"
하소연을 구구절절하려고 했는데, 짧고 쿨하게 대답해주던 상사.
하면 된다.
이 말도 안되게 교과서적이고 기본적인 조언을 따라보기로 했다. 어차피 잃을 것은 없다. 해보거나, 나가 떨어지거나.
그리고 그 뒤로 2년 반 후, 다른 곳의 인터뷰를 보는데 그 회사의 홍콩 President가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 "너 영어 어디서 배웠니?"
작더라도 성공의 기억은 더 자신있는 나로 이끌어 준다. 그것도 힘차게!
한국 토박이가 비즈니스 영어를 잘 해서 외국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적어도 잘 하는 것처럼 보이려면, 듣기/말하기/쓰기가 다 되어야 했다.
내 경우에는, 이 3가지를 분리해서 공부할 시간이 없었고,
내 영어 실력이 올라가기를 기다려주는 회사는 지구 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아래 크게 2가지 방법을 택했다.
- 전화영어, 비싼 영어학원, 1:1 과외, 별거 다 해봤다. 그런데, 무얼 하든지 내가 미리 표현을 익혀서 가지 않으면 내가 쓰던 말만 계속 쓴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돈을 얼마를 쓰던 영어가 늘지 않고, 왔다 갔다 하느라 몸만 축났다.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가르쳐주는 표현들을 그때 딱 익히고 몇 번 따라 읽고 외우려고 노력해도 가방 싸서 돌아가는 길에 이미 희미한 기억 속.
- PT할 일은 생각보다 많았고, 전화는 왜 이렇게 자주 하자고 하는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지만, 자존심에 못한단 말은 하고 싶지 않았고 자꾸 학원만 오가면서 어린 아들 볼 시간도 줄어들어 택한 방법은 바로 미드/CNN 보면서 shadowing 하기였다.
추천 1. 의외로, 미드/CNN 보면서 shadowing 하는 게 단어와 표현을 단기간에 익히기에 가장 효과적이었다.
shadowing 방법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겠지만, 먼저 자막 없이 영상을 한 번 쭉 본다.
그러면, 내가 아는 단어 / 맥락을 조합해서 얼핏 들리는 단어 / 저 상황에는 이런 말을 하겠지 하는 감으로 때려 맞추는 단어가 섞여서 알 듯 모를 듯한 상태로 일단 한국어 자막이 절실한 상태가 된다.
그래도, 이번에는 영어 자막을 켜놓고 한 번 쭉 본다.
아까는 그림만 보고 넘어갔던 장면들이 쪼금은 더 이해가 된다.
그 후, 오늘 공부할 구간을 정하고 입에 붙을 때까지 무한 반복 shadowing에 들어간다.
등장인물의 대사를 그대로 따라 하는데, 자막을 켜놓고 자연스럽게 따라 할 수 있을 때까지 한다.
몇 번이고 정해놓은 것은 없었다. 쉬운 것은 한 번만 했고, 어려운 것은 술술 나올 때까지 계속했다.
그리고, 반복해서 보다 보면 주옥같다고 느껴지는 표현들이 나온다. 그러면, 그건 노트에 적어놓는다.
그럼 한 편에 앞뒤로 한 장 넘게는 꼭 나오는데, 그걸 출퇴근 때 들고 다니면서 또 본다.
이 표현들이 정말 알짜배기들인데, 영어학원에서는 잘 못 배우는 것들이다. 왜 그럴까..를 생각했는데, 학생마다 편차가 커서 괜히 다양한 표현을 다루는 것보다 기본에 충실하는 게 전반적인 학생들의 만족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인 거 같았다.
그런데, 드라마에서 나오는 일상 대화 중 써먹을 만한 것들을 하루에 하나만 기억해서 그다음 날 이메일이든 컨퍼런스콜이든 어떻게든 써보려고 하면 나 스스로가 그렇게 기특해 보일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세요.를 말할 때,
"to take that at face value" 라고 하는 것과 "accept what happened"라고 하는 것 중에서 앞의 표현으로 해주면, 나를 보는 상대방의 진지한 눈빛에서 오는 쾌감이란!
여기서 신경 써야 할 것은, 비즈니스 영어에 도움이 되는 소재를 골라야 한다는 것. 그러려면, 드라마 대사가 professional 하면서, 일상 대화의 수준도 어느 정도 되고, 무엇보다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
미드 중에서, 굿와이프(Good wife), 하우스오브카드(House of Cards),
그레이 아나토미(Grey's Anatomy) 를 가장 추천한다.
재미, 표현의 다양함, 단어의 고급성, 내용에서 얻을 수 있는 직장생활의 팁 까지 다 고려해서!
추천 2. TED 및 HBR : TED와 HBR를 앱에서 심심할 때마다 듣는다.
잠이 안 올 때도 듣고, 출퇴근할 때도 듣고, 운전할 때도 듣고, 집 정리할 때도 배경 음악처럼 깔아놓는다. 물론, 처음에는 아무것도 안 들린다.
몇 달이 지나도 백색 소음 마냥 잔잔하게 깔리기만 하고 아무런 의미 전달이 안 된다. 하지만, 한 편을 반복해서 계속 듣다 보면, 그중에 일부가 들리기 시작하고, 시간을 내서 또 영어 자막을 켜서 읽어서라도 내용을 한 번 이해하고 또 듣는다. 무한 반복. 그리고 위의 shadowing 방법을 활용해서 Sponge처럼 빨아들이기. 시간과의 싸움이지만, 안 되는 건 없었다.
추천 1. 책이나 글에서 본 좋은 표현은 별도로 적어놓고 어떻게든 활용한다.
예를 들어, Agree 100% with A's approach. The texture argument is valid and allows us to leverage the colder months with B product and perhaps a eventful launch of A on May. Given that our company is currently insignificant in moisturizers, we need to build this category with both textures.
한국말로 놓고 보면 심플한데, I agree with A. 보다 Agree 100% with A's approach라고 하면, 의도 전달이 더 명료할 뿐만 아니라 말하는 사람의 확신의 정도에 대해서도 전달할 수 있지 않는가!
추천 2. 이메일을 쓸 때 똑같은 단어는 쓰지 않고, 맥락에 맞게 쓰도록 한다.
- www.thesaurus.com 여기 가면, 동의어를 많이 찾아준다. lather / foam / froth.. 다양하게 표현해야 생각도 유연 해지는 신기한 경험을!
- 단어의 뜻을 찾을 때, Google에서 단어를 찾으면 영영사전 버전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물론, 문장 속에서 어떻게 쓰는지도 같이 찾아볼 수 있어서 시간은 좀 더 걸리지만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참,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국어가 아니다 보니 매일 하지 않으면 다이어트처럼 요요가 금방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