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는 서울에서 하고 싶다.
파리로 이사를 간다고 했을 때,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좋겠다", 그리고 뒤이어 "나도 파리 가고 싶다"는 말을 했다.
로맨스와 쇼핑 거리가 넘치고, 아름다운 중세 건축물이 모든 길과 골목에 자리 잡고 있으며, 가히 세계적이라고 할 수 있는 박물관과 미술관들이 즐비한 도시.
하지만, 곧 (영국 학교 학제로) 중학교를 가야 하는데 서울에서 공부보다 본인의 행복에 치중했던 부족한 영어 실력의 아들, 매일매일 논문을 가열차게 쓰고 해외 저널에 출판을 해야 졸업하고 겨우 교수가 될까 말까 인데 체력과 정신이 분산 되는 것에 대한 위기 의식, 불어라고는 봉주르 외에는 단 한 마디도 모르는 까막눈에 다가, 이 와중에 마흔 넘어 생긴 10주차의 둘째를 품은 나는 쉽게 좋아하지 못했다.
서울에서 계속 엑셀레이터만 밟아도 시원찮을 판에,
말도 통하지 않는 도시에서 페달 밟는 법부터 익혀야 하는 상황.
얼마나 많이 넘어져야 할까... 그 익숙하지 않음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그리고 역시나. 파리는 나를 절대 실망시키지 않았다.
익숙치 않은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댓가를 치뤄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듯이. 몇 달이 지난 지금까지, 정착의 모든 과정은 단 하나도 수월하지 않고 있다(현재 진행형이다).
여기 사람들은 '빠른' 것에 대한 열망이 없고, 불어 못하는 것에 대한 자비가 없다.
주문하고 몇 시간 뒤에 물건 받는 것을 유독 애용했고, 은행/보험/관공서에 전화를 해도 10분 내에 모든 용건을 끝내는 걸 좋아하고, 10분 이상 걷는 거리는 차로 다니고, 대중교통도 가장 빠른 환승 위치를 굳이 찾아서 그 자리에 딱 서서 최소 시간으로 이동을 하곤 했다.
여기서는, 신청한지 2달이 넘도록 은행 계좌, 수표책, 신용카드를 발급받지 못했다.
담당자에게 3~4일에 한 번 전화하는데 10번에 2번 꼴로 전화를 받는다. 메모를 남겨도 콜백이 없다. 겨우 받았을 땐, 곧 처리해줄 거라면서 밝게 얘기하는데, 끊고나면 감감 무소식이다.
우리 집에서 RER (지하철 1호선 같은 서울과 외곽을 이어주는 노선)을 타고 파리 시내로 나가야 하는데, 자주 "대폭 지연"이라고 뜬다. 공사를 하거나 문제가 있으면, 여유롭게 다 해결될 때까지 그냥 운행 정지를 해버린단다. 게다가, 바캉스 시즌이라도 되면 수리조차 여의치 않아서, 다니지 않는 날도 꽤 많다고 한다.
병원을 가려고 해도 doctorib.fr 사이트에서 무조건 '헝데뷰(예약)'을 잡아야 의사를 만날 수 있다. 그나마도 동네의 제너럴 의사를 만나야 전문의를 만날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직은, 제너럴 의사와 전문의 구분이 일자리 나눠갖기 이상의 의미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겨우 전문의를 추천받아 예약을 하려고 해도, 유명한 의사는 오늘부터 보통 2달 뒤에나 만날 수 있다고 뜬다. 대단한 질병도 아니고, 두통이나 감기 등 검진이나 발목 염증 등 가벼운 질병인데도 그렇다.
좀 찜찜하긴 해도 바로 예약이 가능한 의사를 찾아 며칠 뒤에 방문을 하면, 약이나 처방해주고 별다른 의견도 듣지 못하고, 100유로 (13만원 가량) 가까이 내고 돌아와야 한다.
미국 병원 (American hospital)을 가면 그나마 한국 같은 서비스를 해주는데, 가격이 엄청나다고 한다.
지인이 발목 염증 치료 받고 200유로 내고 왔다고 한다. 현지 가격의 2배 (한국의 20배?)를 내야 내가 알던 그 서비스 비스끄무레 한 것을 받는 것이다.
한국인 의사이자 파리 생활 2년차인 친구는 아프면 겁부터 나고, 병원은 여태 가본 적이 없다고 한다.
뱃속의 기쁨이가 잘 자라는지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는가.
초음파 보는 의사, 피 검사 하는 연구소, 출산을 돕는 의사 등 분업화가 세세하게 되어 있고 초음파 기계가 모든 산부인과에 있는 것도 아니란다.
10주차에 맞는 의사를 찾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겨우 불어가 능통한 후배한테 부탁해서 예약을 잡았다.
피검사까지 마쳤는데, 피검사 결과를 전화로 알려준단다. 2주 뒤 전화가 온 것 같은데, 불어로 계속 얘기를 해서 영어하는 분 없느냐.. 라고 했는데, 개의치 않고 계속 불어로 얘기한다. 여긴 이런 식이다. 영어로 물어보는 동양인에게도 불어로 계속 안내를 한다. 하하하하하.
나는 조용히 빨간 종료 버튼을 눌렀다.
잘 자라고 있겠지. 그렇게 믿기로 한다.
아마존 프라임을 가입해야 겨우 물건이 제때 오거나 제대로 온다고 해서 가입을 했다. 프랑스에서 가장 흔하고 가장 큰 마트인 까르푸(SSG같은)에도 온라인 구매가 있긴 한데, 쓰지 말라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연간 회원으로 가입하고 물건을 신나게 담고 있는데, 갑자기 계정이 정지가 되었단다.
무슨 소리니, 아마존아... 왜 정지 당했는지, 설명도 제대로 없다.
생수를 들고 올 수가 없어 겨우 주문했는데, 이런 손절을 당하다니. 분노에 차서 네이버를 한참 뒤져서 알아냈다. 카드 회사에서 내 이름/전화번호/주소가 프랑스 현지 것으로 되어 있어야 하는데, 이사온지 얼마 안되어서 다 한국 관련 내용으로 되어서 의심 계정이라 오류가 났다는 것이다. (billing address와 delivery address가 다르다나...)
아마존 사이트에는 고객센터 전화번호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 이메일 주소도 없다.
챗봇은 무용지물이다. FAQ를 이글거리는 눈으로 찾았는데, 내 경우에 대한 설명은 없다.
트위터와 페이스북 메시지를 남겨본다. 겨우, 트위터에 답을 받았고, 받은 링크를 따라가다 보니, 겨우 그제서야, 전화번호 하나를 준다.
혹시라도 정보가 날아갈라, 그 전화번호를 섬세하게 복사해서 저장을 해둔다.
주위 불어 능통자에게 카톡을 보내서 이러이러한 어려운 상황이라 전화를 부탁드렸다. 전화했더니 불어만 나온다. 영어로 들으려면 1번 눌러라... 이런 안내도 없다.
그렇게 4일 뒤에 그 분을 만나 전화를 했고, 15분간 그 분이 불어로 장황하게 (이쯤되면 장황한 거 아닌가) 설명을 했고, 담당자는 본인이 해결을 못하고, specialist가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다시 전화를 준댄다.
그 설명을 듣고 울상이 된 나에게 그 분은 "저는 불어를 못합니다. 영어 가능한 분으로 부탁드립니다"를 불어로 녹음해 주었다. 이 정도는 좀 외워서 말하라고...
네네, 그럼요.
신통찮은 대답을 했고, 다행히 별 후속조치 없이 계정이 풀려서 지금은 아마존에서 보안 경비 시스템을 주문하고 있다.
이곳 주택가가 얼마나 허술하게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조만간 풀어내려 한다.
지금, 식탁 맞은 편에서 남편은 온라인으로 자동차 보험을 신청하고 있다.
한국과는 달리, 별 걸 다 물어본다. 모든 질문을 구글 번역기로 재확인하고 선택을 해야 하는데, 세상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질문들이 대부분이라 생각을 요한다. 생각을 해도 이게 맞게 쓴 것인지는 우린 알 수 없다.
남편이 1시간째 신청을 하고 있는데, 30분즘 지나니 표정이 일그러진다.
그리고, 시시콜콜 브런치에 일기를 쓰고 있는 나에게 "뭐해?"라고 묻는다.
신경질을 품고 있는 질문에 웃으며 대답한다.
그냥 있어 :)
아직 조금이라도 팔팔할 때, 포기하고 기다리는 삶을 살아보는 것도 괜찮지 뭐.
하지만 우리, 은퇴는 서울에서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