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2주간 다녀온 이태리 토스카나 여행의 포문을 정육점에 대한 이야기로 열어본다. 아름답기 그지 없는 두 눈 가득히 푸르른 밀밭(Val d'orcia)이나 중세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시에나(Siena)가 아니고, 정육점이라고? 사실 엄마도 파리에서 이틀간 1200km를 달려간 토스카나에서 가장 인상적인 곳으로 꼽는 곳이 정육점이라니, 스스로도 꽤 당황스럽긴 하다. 그런데 말이다, 엄마는 여기가 감동적이었어. 정육점 특유의 쿰쿰하면서도 살짝 비린내까지 말이다.
동네 산책을 꾸준히 하다 보면, 크던 작던 가게들의 흥망성쇠를 보게 된다. 어떤 가게는 문을 열자마자 닫지만, 어떤 가게는 한참 뒤에 다시 가봐도 여전히 잘된다. 그리고, 오랫동안 - 적어도 몇 년, 몇 십년 - 영업을 해온 가게들은 화려하지 않더라도 그만의 독특한 매력이 있다. 어떤 가게들은 since 또는 depuis 1980 이렇게 적어두는데, 우리는 그런 연혁을 보면 경험하지 않아도 신뢰를 미리 해버리는 경향도 있다. 그만큼, 오랜 시간이 쌓아주는 가치가 분명 있기 때문이지.
우리는 그날, 시에나에서 출발해서 몬테풀치아노에 위치한 아그리투리스모 숙소에 가는 길이었다. 맛있는 것을 위해서라면 두 어시간 돌아가는 길도 마다하지 않는 우리 가족은, 그레베 인 끼안띠 (Greve in Chianti)라는 작은 마을에 맛있는 집이 있다고 해서 들렀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마을에 점심때 즈음 입성했고, 유럽 사람들처럼 한참 점심을 먹은 뒤 어슬렁어슬렁 동네 산책을 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곳이 이 정육점이었다. 알고보니, 이태리에서 가장 오래된 정육점. 무려 218년째 같은 자리에서 정육 관련 사업을 하고 있는 곳이었지. 밀라노나 로마처럼 큰 도시도 아니고, 2017년 기준 13000명 가량 살고 있는 작은 마을에서 어떻게 두 세기가 넘는 긴 기간 동안 영업이 가능했을까? 여기는 도대체 어떤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있는걸까?
이곳의 이름은 Antica Macelleria Falorni (우리 말로 해석하자면, 고대 파로르니 정육점). 엄마는 이 이태리에서 가장 오래된 이 정육점을 통해서 너에게 3가지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다.
내가 가장 잘 하는 것을 더 잘하게 만들고,
그 누구보다 잘하게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1806년, 창업자 파로르니가 정육점과 도축장을 인수하면서 시작한 이 사업은 질 좋고 맛있는 고기로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고 한다. 1844년 경, 지금의 이름으로 그레베 인 끼안띠에서 아직도 유지하고 있는 그 자리에서 가게를 열었다고 한다. 마차타고 다니던 그 시절이었지만 높은 품질과 맛 덕분에 이태리 인접 국가까지 고기를 팔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우리 서울 살 때, 충북 음성에서 소고기를 주문해서 먹었던 기억이 날지 모르겠다. 10분만 걸어가도 마트에서 고기를 살 수 있지만, 사람들은 특별한 날 특별한 과정을 거쳐서 특별한 품질의 제품을 얻고 싶어해. 그리고, 그 노력을 들여서 얻은 것에 대해서는 더 특별한 마음을 갖게 되기도 하지. 그러니, 네가 잘 하는 것을 갈고 닦아서 더 잘하게 만들고, 그 누구보다 잘하게 된다면, 네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든지 간에 너를 찾는 사람들은 무조건 있단다.
여기서 첫 번째로 중요한 건, 네가 가장 잘하는 것을 고르는 일이겠지. 어릴 때는, 내가 잘 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 중에서 고민을 하게 되는데, 지금까지 경험에 비추어 볼때, 잘 하는 일을 선택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볼 때 더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왜냐고? 잘하는 일을 하면 자연스레 성과가 따르고, 보람도 느끼게 되고 다른 사람들의 인정도 같이 수반되는 경우가 많아. 신기하게도, 그렇게 되면 처음에는 그렇게까지 그 일이 좋지는 않더라도, 잘하니까 점점 좋아질 가능성이 높다. 사람의 기본 욕구 중에는 인정 욕구가 있다고 하는데, 잘하는 일을 하게 되면 이 욕구가 채워지고 좀 더 앞으로, 그리고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는 힘이 되어 주기도 해. 그런데, 좋아하기만 하는 일의 경우, 만약 잘 하지 못한다면, 그 일을 길게 끌고 나가기 버거워 진단다. 좋아하는 데 잘 하지 못하니, 쉽게 자괴감에 빠질 수도 있고, 그런 시간이 길어지면 내가 이 일을 좋아했었나 하는 회의감도 들 수도 있는데, 거기까지 도달했다면 이미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썼을 가능성이 높아. 즉, 아까운 시간을 되돌릴 수 없게 될 수도 있지. 물론,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이 일치한다면, 더없이 행운이고 감사할 일이야. 주저없이 그 일을 하면 된단다. 자, 다시 정육점으로 돌아가서, 19세기의 파로르니도 아마 도축과 고기 선택과 관리, 손질, 손님들과의 거래를 뛰어나게 잘 하는 사람이었을거야.
그런데, 아무리 고기가 맛있다 한들, 생고기는 유통기한이 길지 않고, 저장하고 운반하는 절차에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사세확장을 하려면 다른 전략이 필요하지. 규모를 크게 키우거나 지금 처한 상황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싶다면 말이다.
내가 처한 시간(상황)과 목표에 따라 전략을 세워야 한다.
그래서, 1940년에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한 라파엘로라는 사업가와 협업을 해서, cold cuts 상품을 개발했다. 우리가 지금 좋아하는 쏘시송(소세지 같이 고기를 다져서 소금, 향신료를 넣어 만들고, 프로슈토, 살라미, 햄 등의 종류가 있다) 같은 것이야. 저장을 오래할 수 있고, 그러니 고속철도가 없던 시절에도 더 넓은 지역까지 판매를 할 수 있게 되었지.
1975년에는 slow food라는 슬로건을 만들어서 기업 철학으로 세우게 된다. 1975년이면, 비행기로 여행하던 사람들도 많지 않던 시기. 사실 모든 것이 여전히 '느린' 때였지. 별로 빠르지도 않던 시절이었는데, 60년대 보다는 확실히 빠르게 흘러갔을 것이고, 그런 현상이 가속화될 것이라고 예상했겠지. 그래서,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지켜야 할 가치에 대해 생각했을 거야. 모두가 바삐 돌아가는 세상이지만, 먹는 것은 제대로, 천천히 정성들여 만든 것을 먹어야 한다는 철학에 기초해서 slow food라는 단어를 생각했고, 밀고 나간 거야.
이 정육점에서 품질과 맛에 대한 자부심을 중요하게 여기고, 본인들이 잘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그 가치를 인정해줄 수 있도록 만든 슬로건 slow food.
가장 잘 하는 것을 지키고 더 잘 하게 만들면서, 시대 상황이 변하면 거기에 맞게 나의 핵심 가치를 잘 표현해주는 어구로 철학을 표현하는 것. 이것도 꼭 짚어주고 싶은 면이란다.
잘하는 일을 찾아서 지속하더라도, 언젠가는 벽에 부딪칠 때가 있을 거다. 빨리 오던 늦게 오던, 어려운 시기는 반드시 온다. 그 때, 그 시기에, 네가 상황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잘하는 것을 시장에 맞게 재창조하고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네가 잘하는 분야에서 전문성을 갖자.
마지막으로, 너가 의지를 갖고 재미있게 하는 일은 소중하다. 그러니, 남들 이목에 신경쓰지 말고, 너가 살고 싶은 길을 내어서 행복하게 꾸준히 하면 된다.
엄마 세대의 많은 사람들은 남들이 좋다고 하는 일/안정적인 일을 하라는 교육을 많이 받았다. 이건 엄마의 엄마아빠 세대의 잘못 만은 아니야. 전쟁의 폐허 속에서 모든 것들을 문자 그대로 재건했어야 했고, 경쟁에서 이겨야 먹고 자고 입는 문제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공부를 하기는 어려운 처지였으니 그 와중에 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들이 돈을 더 많이 벌고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갔다. 이 명제는 사실 어느 나라나 어느 시대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칙인데, 나라의 시스템, 법제가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소수가 권력을 갖게 되면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하지. 게다가 서울처럼 많은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살고, 옆집/친구네와 끊임없이 비교를 하는 문화가 생기는 조건에서는 어떻게든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것을 두고 한국의 문화는 나쁘다 또는 그르다 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진화의 산물이자 구조적인 문제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다만, 나라별 역사적, 문화적 특성을 정확히 알고 있으면서, 너의 중심을 올곧게 잡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니, 남들이 뭐라고 하든, 네가 살고 싶은 길을 찾아서 행복하게, 꾸준히, 의지를 갖고, 재미있게 하면 된다. 그 길을 엄마는 지지하고 응원한다. 만난 적은 없지만 파로르니 역시 비슷하게 생각했을 것이고, 자녀들에게도 그렇게 얘기해줬을 것 같다.
가장 처음하는 이야기는 대개 중요하거나, 재미있거나, 아니면 인상깊었던 것인데, 이곳은 정육점이지만 감동을 주는 곳이었다. 아이야,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주변의 환경을 한 번쯤, 특히 일이 잘 안 풀리는 날에, 유심히 관찰해 보자. 늘 그 자리에 있는 것들이 어쩌면 너에게 해답을 들고 흔들고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