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 대화 시뮬레이션

2025년 8월 13일 수요일 을사년 갑신월 갑인일 음력 윤6월 20일

by 단휘

누군가는 대화를 하기 전에 그 대화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돌린다고 한다. 조만간 있을 법한 대화에 대해 미리 준비를 한다거나, 어떤 주제에 대해 이야기 꺼내기 전에 상대의 예상 반응을 생각해 본다거나. 나는 별로 그러는 것 같지 않다. 언젠가 있을 법한 대화보다는 없을 법한 대화에 대한 시뮬레이션이라면 오히려 좀 하는 편이다. 그저 공상에 가까운 무언가.


하지 않을 법한 이야기를 가상의 청중을 향해 늘어놓는다. 가상의 청중은 특정 누군가로서 대화에 참여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나 혼자 말을 늘어놓을 뿐이다. 그러다 가끔은 내가 방금 정말 무례한 발언을 했다는 걸 인지하고 흠칫한다. 밖으로 내뱉었다가는 문제 될 여지가 있는 발언. 필터링 없는 말들 사이에 필터링이 필요한 말들이 섞여 있다. 내뱉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는 걸까. 나의 가상의 청중들에게 어떤 변명이라도 해야 하는 걸까.


때로는 접점이 딱히 없는 사람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시뮬레이션을 돌려 보지만 잘 되지 않는다. 자주 만나는 사람도 자주 연락하는 사람도 데이터가 모자란 느낌이다. 머릿속에 이미지를 그려내는 능력의 결여로 모든 게 텍스트 기반으로 흘러간다. 아니, 잘 흘러가진 않는다. 삐꺽거리다가 아무것도 아닌 무언가로 흩어져 버린다. 흥미로울 것 같던 이야기들은 나의 사고를 거쳐 별 거 아닌 잡생각으로 사라져 간다. 인간관계에 대한 능력만큼이나 이런 쪽으로도 뛰어난 사람에 대한 부러움이 있다.


약간의 반응을 제외하고는 그저 혼자 늘어놓을 뿐 대화 시뮬레이션을 제대로 돌리지 못하는 것만큼이나 실제 대화에도 약간의 이슈가 있는 것 같다. 대화가 길어지면 대화 주제를 잊어버리곤 한다.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는지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상대가 내 생각을 물을 때면 대화에 참여하고 있었음에도 무엇을 묻는지 모르겠는 경우가 많다. 어느 순간부터 대화 내용을 못 따라가서 상대가 어떤 맥락에서 저런 말을 하고 있는지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나의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못 쫓아갈 때 한 번 정리를 해주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내가 대화에 참여할 생각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멍 때리고 있었냐는 반응이다. 어떤 식으로 해소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학교 다닐 땐 수업을 듣는 것으로 학습이 안 되어 일단 필기를 남겨 놓고 수업이 끝난 후 그것을 읽어보며 공부를 했던 기억이 있다. 필기는 시험공부용이 아니라 수업 직후 수업을 따라가기 위한 것뿐이었다.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필기 같은 걸 좀 해야 하나, 하는 시답잖은 소리나 내뱉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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