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9일 화요일 을사년 무자월 임자일 음력 10월 20일
문학 작품을 만났을 때 나의 상태는 보통 둘 중 하나다. 작품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서사를 도저히 따라가지 못한 채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작품에 과몰입하여 그 세계관에서 한참 동안이나 벗어나지 못한다. 책도 그렇고 연극도 그렇고. 영화는 아직 그래본 적이 없다. 영화 상영 시간 내내 그 시청각 자극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성공해 본 적 없을뿐더러 굳이 그렇게까지 도전해 볼 필요성을 못 느꼈다.
뮤지컬의 경우 가끔 맴도는 넘버들이 있다. 거기서 새어 나오는 감정에 매몰되어서 좋을 게 없지만 때로는 그렇게 매몰되곤 한다. 이런 죽음을 꿈꿨는데, 따위의 소리나 하고 있다. 생각해 보면 나에게 영향을 준 작품도 여럿 있다.
미래를 약속하고 함께 꿈꾸게 한 앙리 뒤프레(나의 빅터는 내 삶에서 완전히 떠나갔을 뿐만 아니라 나의 고립은둔에 한몫한 두 번째 사람이 되어 버렸지만),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한 토마스 위버, 무대 위의 삶을 꿈꾸게 한 조제프 그랑, 꿈을 좇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느끼게 한 요하네스 케플러,... 그리고 기억 저편에 묻혀 있는 많은 이름들.
최근에는 그렇게 몰입할 만한 작품을 만나지 못했다. 아니, 만나지 않았다. 그것에 지나치게 몰입하면 한동안 나의 일상생활에 상당한 지장이 있다는 걸 알고 있기에 만나려 하지 않았다. 아니면 차라리 아예 광기에 사로잡혀 살아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도 가끔 들긴 한다. 책의 경우 소설을 안 읽고 지낸 지 오래되었다 보니 마지막으로 매몰되었던 책이 《데미안》이려나. 구체적인 어휘로 표현할 순 없지만 상당히 잘 읽히고 뭔가 많이 와닿는 책이었다. 정신적 여유가 될 때 소설도 이것저것 읽어보고는 싶은데, 그 정신적 여유라는 건 언제쯤에나 생길지는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