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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다니 Jun 14. 2018

한참만에 깨달은 진리

기차에서는 창밖을 보는 겁니다



대학원의 마지막 수업을 들으러 가는 길-
KTX 창가에 앉아 나는 처음으로 한참 창밖을 내다보았다. 늘 휴대폰에 집중하거나 노트북이나 책을 펼치곤 했었는데, 오늘은 마지막이니까 내가 그동안 수없이 지나쳐온 이 길을 기억하고 싶었다. 이상하게도 1년 반동안 대략 90번 가까이 오간 길인데도 창밖에 펼쳐지는 풍경이 참 낯설었다. 이렇게 나무가 많았구나, 여긴 어디쯤일까, 여기도 물이 있네- 하면서. 마지막 발표 과제물을 잠시 덮고 한참을 멍때렸다.

문득 내가 지금껏 걸어온 길들이 동떨어져있는 줄만 알았는데 돌아보니 모두 하나로 엮어지는 것이 신기했다. 서른에 대학원 공부를 마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논문을 잠시 접어두고 긴 여행길에 오르게 될 줄은 몰랐지만, 여태 결혼도 안 하고 부모님과 살고 있을 줄도 몰랐지만, 나는 지금 어렸을 때 꿈꿨던 나의 바람대로 조금씩 살아가고 있었다. 그 때는 뭔지도 모르고 막연하게 상상했던 일들이 지금은 꽤 명확해진 것도 많았다.


돌이켜보니 내게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들었던 은사님들의 소중한 말씀이 몇 가지 있었다. 감수성과 상상력, 그리고 통찰력을 꼭 잃지 말고 살라고 말씀하신 국문과 교수님의 말씀, 퍼스트펭귄이 되어서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라는 언론정보학과 교수님의 말씀- 그 중에 내가 가장 자주 떠올리는 것은 우리 목사님의 말씀인데, 얼마 전에도 그 말씀을 설교 시간에 들은 것이 생각났다.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감사하게도 부모님께 좋은 것들을 몇 가지 물려 받았다. 나의 어떤 노력도 없이 내게 무언가 이미 주어졌다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다. 반면에 우리 가족 중 어느 누구 하나 할 줄 모르는 일들도 많다. 그럴 때 우리는 고민 없이 전문가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잘할 수는 없다. 그걸 인정하는 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에게는 분명히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내가 잘할 수 없는 (혹은 세상의 공급과 수요 관점으로 봤을 때 굳이 내가 잘할 필요 없는) 일이 있다. 흔히 용기를 줄 때 포기하지 말라고들 하는데 때로는 포기할 줄 아는 것도 정말 큰 용기다. 나는 그동안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내가 정말 잘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았고, 그것은 대개 다행히도 내가 어마어마한 노력까지는 하지 않아도 얻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렇게 내가 가진 강점을 발견하면 조금 더 효율적인 삶을 살 수 있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여행 중에 길을 잃었을 때나 목적을 잃은 채 달려온 삶에 브레이크가 걸렸을 때, 나는 종종 스스로 이렇게 묻는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아무리 매 순간 열심히 살아가더라도 인생의 길 위로 저 멀리 드론을 띄워보지 않는 이상, 지금 내가 인생의 어디쯤을 걷고 있는 것인지 알 도리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하는 일의 목적을 잊지 않으면 힘들 때 덜 방황하게 된다. 당장 힘들고 귀찮은 고통이 닥쳐와도 그것을 시작한 목적을 떠올리면 여지없이 투정을 그치게 된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의 연결고리다. 과거가 없으면 지금도 없고 지금이 없으면 미래도 없으니까. 때때로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과거에 비해 혹은 먼 미래에 비해 조금 부족하거나 보잘 것 없어 보여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그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조금 더 나아진 내일의 지금을 기대하며 사는 거니까.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 중요하다는 말이 있다. 나는 그 말을 참 좋아하는데, 가끔은 나의 제멋대로인 인생을 해명하거나 합리화시키기 위해 사용하기도 한다. 사람의 일생에는 일정한 생애주기가 있고 모두가 비슷하게 인생을 살아간다고는 하지만, 사실 인생의 속도는 사람마다 모두 다르다. 어느 누구도 자신과 100% 똑같은 인생의 경험과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을 본 적은 없을 거다. 수십년을 같이 산 가족도, 심지어 한 배에서 동시에 태어난 쌍둥이들도 모두 다르니까. 중요한 건 얼마나 발 빠르게 남들처럼 잘 살았느냐가 아니라 내가 걷는 길이, 정말 내가 원하여 선택한 길이냐는 것이다. 다른 이의 시선을 의식하여 혹은 다들 이렇게 하니까 하고 그냥 따라 하는 것은 진짜 나의 선택이라 할 수 없다. 나를 분명히 알면 방향은 자연스레 보인다. 혹 그 길이 조금 좁고 험해 보일지라도, 분명한 건 안개가 조금은 덜 낀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이다.




수많은 꿈을 꾸었던 10대를 지나고, 숨가쁘고 치열했던 20대를 지나 드디어 나를 좀 더 많이 알게 된 30대가 되었다. 이제는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찾았으니, 그걸 더 잘하기 위해 노력할 일만 남았다. 이후에는 또 어떤 삶이 나를 맞이할지 아직은 모르겠지만, 조금 더 살아가다보면 내가 지나온 길을 걸을 누군가에게 조금은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한다. 내 곁에 좋은 이야기로 격려해주신 멋진 분들이 계셨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처럼-


나 또한 부디 누군가에게

오래도록 기억될 좋은 문장이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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