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잡다니 Jun 24. 2018

긴긴 여행의 시작

프롤로그



2016년 가을, 나는 일 년 간 한국 땅을 밟지 않고 세계를 떠돌겠다고 다짐하고 여기저기 떠벌리며 한창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다 돌연 가벼운 접촉사고가 났는데 어쩐지 후유증이 심해져 이듬해 초까지도 나는 계속 비실거렸다. 물론 중간 중간 짧게 여행을 하긴 했지만 결국 나는 일년을 계획한 장기 여행은 포기해야만 했다.


많은 사람들이 세계일주가 꿈이라고 말하고 나 역시 감히 시도해보지는 못했지만 언젠가 더 많은 땅을 내 발로 걸어보길 소망했었다. 2년 간의 직장생활을 마치고 20대의 마지막이 되던 해, 그 때가 바로 긴 여행을 시도할 수 있는 내 인생의 마지만 기회인 것만 같았다.


하지만 사실 그 때 당시의 난 분명하게 어딜 가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냥 떠나고 싶었다. 어딜 간다는 것은 목적지가 분명히 있는 움직임이지만 그냥 떠난다는 건 목적도 방향도 없이 지금 있는 곳을 일단 벗어나는 것. 나는 딱 그 상태였다. 열심히 루트를 짜긴 했지만 그냥 남들이 많이 간다는 길 위에 내 시간을 얹기로 했던 것이다. 그게 어디든 나는 그저 낯선 도피처가 필요했다.


세계일주의 꿈은 명분일 뿐, 사실 그 때의 난 어디에도 말할 수 없었지만 온종일 날 괴롭게하는 것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지금은 다행히 그 감정들이 또렷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그 당시 내가 썼던 일기만 다시 읽어도 마음이 울컥하다.


아무도 없는 곳.
그러니까 내가 누군지 관심없는 이들만이 존재하는 곳.
그토록 낯선 곳에서 하염없이 울어보고 싶었어.
누구의 위로도 받지 않고,
그냥 원없이 홀로 울다가 손등으로 눈물을 스윽 닦고,
아무 일 없었던 듯이 다시 걸어보고 싶었어.
여기 오길 잘했다 생각하며-



많은 것들과 간절히 이별하고 싶었다. 누군가처럼 한국이 지겨워서도, 버킷리스트를 이루고 싶어서도, 힘든 직장생활에 지쳐서도, 돈이 아주 많아서도 아니었지만 그 때의 나는 떠나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타인의 좋은 위로 대신 오롯이 내가 날 가만히 내버려둘 아주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것만으로도 떠날 이유는 충분하다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이후로 일년 반의 시간을 기다리고 나서야 드디어 나는 여행길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그 사이 많은 것들이 치유되었고 준비되었다. 또 적당히 나의 호흡에 맞춰 포기할 것도 내려놓게 되었다. 더이상 나를 말리는 이도 없었고, 모두가 날 응원해주고 배려해주었고 또 부러워했다. 이제는 정말 떠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내가 왜 나홀로 이토록 긴 여행을 떠나려 했는지 목적을 잃은 것이었다. 아직도 나만의 시간이 이렇게나 길게 필요할까. 사실 그동안 시간이 꽤 흘러 괴로운 감정들은 적잖이 사그라들었는데. 여행의 시작을 코앞에 두고 나는 급격히 외롭고 귀찮아졌다. 그래서 급히 여행 동행 찾았고, 이제는 떠나기 위한 여행이 아니라 잘 돌아오기 위한 여행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긴긴 시간을 돌아 어쨌든

언제 끝날지 모르는 나의 긴긴 여행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