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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다니 Jun 28. 2018

여행의 균형

장기여행자의 여행 원칙



어떤 일이든지 균형이 중요하다는 것이 나의 지론. 가끔은 그놈의 균형 때문에 누군가에게 뜻하지 않은 상처를 주기도 했고 또 받기도 했지만 내게 삶의 균형을 지키는 일은 매우 중요했다. 균형을 지킨다는 건 꽤 그럴싸하게 들린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매우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모든 일이 균형적이고 공평할 수만은 없는 법. 나는 때때로 균형에 집착하다가 비인간적인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고, 가끔은 나의 그 균형 논리가 이상한 강박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런 내 모습을 늘 고치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또한 나는 지루한 걸 못 참아서 반복하기도 싫어하고 늘 새로운 자극을 원하는 편이다. 학교 다닐 때에도 같은 걸 계속 보고 외우며 공부하는 것이 정말 힘들었고, 부모님의 바람이셨지만 내가 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도 같은 수업을 여러 번 해야 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러나 누구나 그렇듯 삶에 어느 정도의 반복적인 일상이 아예 존재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일상과 비일상의 조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삶의 균형을 위해서 나는 기회가 될 때마다 낯선 곳으로 떠나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그리고 여행을 떠나서도 균형의 법칙을 적용하긴 마찬가지였다. 한 번 가본 도시는 아무리 좋았어도 앞으로 갈 여행지에서 늘 후순위로 밀렸고, 같은 도시에 오랫동안 머무는 일도 내게 큰 흥미를 주지 못했다. 특히 하루종일 놀며 쉬며 지낼 수 있는 휴양지는 내게 정말 지루한 여행지였다. 한 나라나 한 도시만 반복해서 가는 여행자나 휴양지 혹은 한 곳에서만 몇 달씩 지내는 여행자를 볼 때면 사실 나는 그들의 즐거움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도 한 번쯤은 그들처럼 반복과 느긋함의 묘미를 느껴보고 싶었다. 그리고 왠지 그것이 더 멋져 보이기도 했다.


장기여행을 앞두고 먼저 떠나 본 많은 사람들이 꼭 해봐야 한다거나 정말 좋았다는 것들을 내 여행 계획 속에 넣고, 꼭 가봐야 한다는 곳들을 빼곡히 나열하며 루트를 짜려다보니, 이건 뭐 제아무리 강철 체력이라 자부하는 사람도 도통 소화하기 힘들 만한 아주 비현실적인 루트였다. 한정된 시간과 정해진 예산 안에서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었다. 몇날 며칠을 새며 루트를 짜고 수정하기를 반복하다가 여러 여행 경험자에게 조언을 구한 뒤, 나는 모든 계획을 접어두고 일단 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뭐지?


나는 왜 이 여행을 가려하는 거지?


학업도 중단하고 하던 일까지 멈추고 떠나는데, 여행이 끝나고 난 뒤 최소한 스스로 후회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여행하는 게 좋을까?


다른 사람이 좋다고 하는 것 말고, 진짜 나에게 어울리고 내가 만족할 여행은 뭘까?


호주의 호스텔에서 만난 유럽 친구들처럼 앞뒤로 내 몸집만한 배낭을 둘러메고 여행할 체력이 될까?


중이염에 약간의 고소공포증도 있고, 허리와 골반 통증에 늘 시달리며 액티비티를 좋아하지도 않는 내가 꼭 인간의 한계에 도전해봐야 할까?


매일 처음 만나는 사람과 하루종일 함께 다닐 수 있을까?


쌀을 먹지 않으면 제대로 식사한 것 같지가 않은 내가 밀가루 음식만 먹고 잘 버틸 수 있을까?


우리집 화장실에 나타난 벌레 하나도 제대로 잡지 못하는 내가 벌레가 득실하다는 곳에서 견딜 수 있을까?


하나님을 믿는 내가 복음의 소식을 전하지 않고, 한 영혼을 위해 기도하지 않고 외면해도 되는가?



...등등 몇 가지의 질문들을 스스로 계속 던진 후에 나는 드디어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나만의 여행 원칙을 세웠다.



1. 무리하게 계획을 세우거나 오버하지 말자. 힘든 날은 쉬어가자.


2. 여기 오면 꼭 해야한다는 것보다 안 하면 내가 후회할 것 같은 일들을 우선 하자.


3. 메인배낭은 10kg 미만을 유지하자.


4. 외로울 땐 친구를 만들고 쉬고 싶을 땐 오직 나홀로 쉼을 얻자.


5. 낯선 사람을 너무 믿지도 너무 의심하지도 말자.


6. 한국음식은 최소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먹자.


7. 어디서든 잠은 편히 잘 자자.


8. 채우는 만큼 빼는 연습을 하자.


9. 억지로 하지 말고 끌리는 대로 잡히는 대로만 기록하자.


10. 내 손길과 발걸음이 닿는 곳에 기도의 씨앗을 심자.



휴대폰 배경화면에 애플리케이션 자리 하나가 비어있는 것조차 보지 못해 억지로 위젯과 앱을 꽉 채우는 균형 강박자인 내가 균형 없는 여행을 한다는 것은 어차피 쉽지 않은 일이다. 남들이 아무리 좋다한들 그들의 모습에 나를 억지로 끼워맞추려 해봐야 어려울 것이기에, 나는 그냥 나답게 '여행의 균형'을 대원칙으로 삼았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여행, 내가 정말로 잘 할 수 있는 여행, 그리고 내가 가장 행복하고 만족할 수 있는 여행은 다른 사람의 글이나 사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나만의, 나에 의한, 나를 위한 여행을 하기로 했다.



이제야 비로소 진짜 '나'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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