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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다니 Feb 21. 2019

정말 인생은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건가요



오랜만에 고속버스를 탔다. 대전에서 서울까지 두 시간 걸리는 건 무궁화호와 똑같은데, 우등버스가 아닌 일반고속을 타면 1200원이 더 싸다. 탕진 잼을 즐긴 후 한 푼이 아쉬운 요즘에는 시간 주고 돈을 산다. 미리 휴대폰 앱으로 끊어둔 표를 창에 띄우고 버스에 타려고 줄을 서는데, 내 앞 쪽에 어떤 할머니께서 종이 티켓을 손에 들고 탑승을 하셨다. 자리를 찾아 통로로 걸어가시는 할머니를 불러 세워 기사님이 종이 티켓을 받아 탑승권 바코드 기계에 찍으셨다. 할머니는 멋쩍은 표정으로 웃으시며 뭐라 뭐라 수줍게 말씀하시고는 다시 자리를 찾으러 가셨고 기사님의 표정은 다소 귀찮아 보였다.



알고 보니 할머니 자리는 내 옆자리였는데 '7번이 어디지' 하며 확신이 없어 자리에 앉으시지도 못하고 멈추어 서계신 모양이었다. 나는 '제가 안쪽이에요' 하며 창가 쪽으로 들어가 앉았고 안전벨트를 매고 등받이를 조금 뒤로 젖혔다. 할머니는 내게 아까와 같은 그 멋쩍은 미소로 '자리가 자꾸 헷갈려서'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할머니의 안전벨트를 끌어다 드리며 '이거 착용하시면 돼요'라고 했다. 할머니는 안전벨트를 착용하시고는 어쩐지 의자에 등을 편히 기대지도 않으시고 달리는 도로가 보이는 버스 앞쪽 창문을 기웃기웃 바라보시다가 꾸벅꾸벅 조셨다. 두 시간이나 가야 하는데-



<스카이캐슬>이 끝난 뒤 요즘은 <눈이 부시게>라는 드라마를 본다. 과거로 시간을 돌리는 시계를 가진 스물다섯 처녀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시간을 자꾸 돌리다가 부모님보다도 훨씬 늙어버려 할머니가 된 이야기다. 김혜자 할머니의 연기가 너무 귀엽고 매력적이어서 매주 월요일, 화요일 밤마다 손꼽아 드라마 시간을 기다린다. 김혜자 할머니의 모습에서 깜찍 발랄한 스물다섯의 연기를 한 한지민의 모습이 자꾸 보인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 드라마를 보며 저마다의 나이와 상황에 따라 비슷한 생각을 하겠지. 나는 드라마를 보면서 만약 내가 늙게 되면 어떨까 하고 종종 생각했다. 어릴 땐 나에게 서른도 오지 않을 줄만 알았는데, 나도 언젠가는 마흔이 되고 쉰이 되고 또 일흔이 되겠지. 아니 그것도 모르는 일인가.



버스 안에서 할머니 옆자리에 앉아 있는데 자꾸 그 드라마 생각이 났다. 할머니는 무슨 일로 서울에 올라가실까? 식사는 하셨을까? 짐이 많지는 않으신 걸 보니 잠깐 마실 가시는 걸까? 고속버스 자리도 잘 찾지 못하고 헷갈려하시는 걸 보면 시외버스를 오랜만에 혹은 처음 타시는 걸까? 서울에 내리면 누가 모시러 나오는 걸까? 늙으면 자꾸만 서러워진다던데 곱게 패인 주름 사이에 내가 모르는 서러움은 얼마나 끼어 있을까? 하는 괜한 궁금증들-



가끔 휴대폰으로 재밌는 걸 볼 때마다 '엄마 이거 봐봐 웃기지' 하고 보여주는데 그럼 엄마는 '안 보여' 하면서 고개를 뒤로 젖힌다. 안 보인다면서 더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더 멀리 간다. 어릴 땐 '외국인이랑 결혼해도 된다', '너 하고 싶은 대로 너 살고 싶은 곳 가서 살아라' 했던 엄마가 요즘은 자꾸 '엄마도 늙으면 버려지겠지' 하신다. 나는 '걱정 마 엄마가 지금까지 나 밥 차려준 만큼은 내가 나중에 엄마 밥 차려줄 테니까'라고 했다. '나중에 아기 낳아 손주 밥까지 차려달라 안 하면 다행이지'라고 속으로 생각하셨는지도 모르겠지만 엄마는 별 대답이 없으셨다.



마흔 한 살이 된 나에게 쓴 편지도 곧 펼쳐볼 날이 오겠지. 지금은 상상하기도 어렵고 어색하기만 한 숫자인데, 서른도 그랬지만 어느새 찾아와 익숙해져 버린 것처럼. 그때가 되면 또 여유 있게 웃으며 서른 한 살 애송이의 편지를 재미있게 읽겠지. 지금의 난 내게 주어진 삶의 남은 시간을 눈이 부시게 아름답다 여기며 그렇게 살아야겠지. 살아온 생이 긴지 남은 생이 긴지 아직 가늠할 수 없는 나이라는 것이 괜히 죄스럽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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