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_ 아이웨이웨이: 인간 미래
전시를 보기 전부터 눈에 띄던 것은 아이웨이웨이가 회화부터 사진, 영화, 설치, 건축, 공공미술까지. 스펙트럼이 넓은 작가라는 점이었다. 실제로 그의 수많은 작품을 보다 보면, 세상에 전하고 싶은 말이 참 많은 사람임을 알게된다.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이 많다는 건, 그만큼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애정과 인간에 대한 대한 관심이 많은 것일 거라 짐작된다.
그런 그에 비해, 나는 눈을 가리고 산다. 당장 내 삶이 벅차서, 주변 이웃이나 더 나은 사회를 위한 가치에 대해선 잊고 지낸다. 지금도 지구 한 편에선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데, 나는 당장의 수업 과제를 해내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전시장 바닥에 놓인 <인용문>에는 “현대인의 비극은 자기 삶의 의미에 대해 점점 더 모른다는 것이 아니라, 모른다는 사실에 점점 더 무심해지는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현대 사회의 많은 이들은 서로에게 무관심하다. 자신의 손으로 눈을 가리고는, 눈을 가렸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눈먼 자들의 도시를 산다.
하지만 아이 웨이웨이는 나라와 시대를 초월해 타인의 이야기에 함께 분노하고 함께 즐거워했다. 전시장 7로 가는 기다란 복도의 천장에 매달린 <구명조끼 뱀>은 레스보스 섬에서 난민들이 벗고 간 구명조끼를 연결한다.
관람객인 우리는 눈앞에서 구명조끼로 만든 뱀의 형상을 보고 있지만, 이 비극의 실체를 온전히 알지 못한다. 가방의 주인은 세상을 떠났고, 구명조끼의 주인은 없지만 아이 웨이웨이는 그들이 남긴 흔적을 기억했다.
우리가 외면한 장면을 기록하는 애정, 이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홀로 눈을 뜬 용기는 어디에서 온걸까. 나라와 시대를 초월해 뿜어내는 열정의 원동력이 궁금했다.
전시장을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작품은 전 세계의 명소에 손가락 욕을 곁들인 사진들이었다. 이뿐 아니라 전시장 곳곳에는 손가락 욕을 모티브로 한 작품들이 있는데, 사실 조금 과하다고 생각했다. 허세를 부리는 중학생들이 욕하는 사진을 SNS에 업로드하는 장면이 떠오를 정도였다. .
이 생각은 전시 후반부의 <민물게>를 볼 때가 되어서야 달라졌다. 민물게의 중국어 발음은 중국 공산당이 외치는 ‘화해’의 발음과 같아서 검열 강화 정책을 뜻하는 속어라고 한다. 말장난을 이용해 표현의 자유라는 주제를 유쾌하고 재치 있게 보여주었다. 그제야 왜 손가락 욕이 아이 웨이웨이의 시그니처인지 알 것 같았다.
자유를 억압하는 감시 문제를 화려한 금빛 문양으로 표현한 <라마처럼 보이지만 사실 알파카인 동물>, 인간 삶과 죽음에 대한 고민을 멋진 초거대 조각으로 표현한 <옥의>까지. 아이 웨이웨이는 사람들이 꺼려하는 주제일수록 멋지게, 아름답게, 화려하게 표현한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은 고급 도자기 속에 난민들의 모습을 담은 <난민 모티프의 도자기 기둥>/ <청화백자 접시>였다. 이 청화백자들은 중국 도자기의 중심지인 징더전에서 제작한 최고품질의 도자다. 보통 도자의 그림으로는 귀족들을 위해 아름답고 무용한 것을 그려 넣는데, 투쟁하는 인간의 고뇌가 담겨있는 것이 아이러니한 매력이 있었다. 속세와 떨어진 이상향의 희망이 담겨야할 곳에 현실 속 난민들의 처절한 생존을 담아낸 점이 아이 웨이웨이다웠다.
세상의 부조리함에 손가락 욕을 날리듯, 진지하고 무거운 이야기를 유쾌하게 표현하는 것이 이 작가의 스타일이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웃음이 동반되지 않은 진리는 진짜 진리라고 할 수 없다”라고 했다. 진지한 고민은 노잼 취급하고 불편한 진실은 외면해버리는 세상에서, 위트를 잃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아이 웨이웨이의 매력이다.
아이 웨이웨이는 “뒤샹 이후, 예술가가 되는 것은 물건을 만들기보다 라이프스타일과 태도를 가지는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가 생각하는 예술가는 어떤 마음가짐,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을 지니는 사람인 것이다.
그는 인간의 미래를 모두가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세상, 또 이것을 미래세대의 모든 타인이 누릴 수 있다는 희망으로 생각했다.
이제서야 전시 제목인 ‘인간미래’가 아이 웨이웨이의 예술적 화두인 ‘인간’과 그가 추구하고자 하는 ‘(현재보다 더 나은) 미래’를 포괄하고 있는 제목임을 이해했다.
전시 속 아이 웨이웨이의 작품들은 대단했지만, 나와 참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온 마음을 다해 희망을 이야기할 줄 아는 태도가 부러웠고, 그에 비해 나는 너무도 쉽게 세상에 꺾이는 것이 속상했다.
삶에 대한 열정과 세계에 대한 애정, 이를 표현하는 재능까지. 과연 타고난 걸까 싶어 존경에, 조금의 질투를 더해 전시를 봤다.
그리고 이 전시의 영어제목이 ‘방어[수비]하다’, ‘(말이나 글로) 옹호[변호]하다’는 뜻을 가진 Defend를 사용해 <Defend the future>인 이 이유가 궁금했다.
전시장을 빠져나오며 본 바닥의 <선언문>에는 “모두에게 친절할 수 없으므로, 시간, 공간, 혹은 정황상 우연히 너와 가까운 관계에 있는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도록 하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유일하게 나와 태도가 비슷한 문장이라 기억에 남았다.
나는 그리 마음이 넓은 사람이 못돼서인지, 나는 바로 옆의 친구를 돌보는 것으로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고해(苦海)에서는 꼭 먼 곳으로 눈을 돌리지 않아도 첨벙이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처음엔 내게 다가오는 파도를 해결하는 것조차 벅차다. 그럼에도 열심히 헤쳐가다 보면 폭풍우를 방어하는 방법이 생긴다. 함께 헤엄치는 이들에게 말을 걸 여유가 생기기도 한다. 가쁜 호흡의 틈에서 옆 사람의 손을 잡아주는 사람을 볼 때, ‘저렇게 사는 사람도 있네? 나도 한 번 손 내밀어볼까?’ 하는 새로운 용기가 생기는 것 아닐까. 그렇게 새로운 삶의 태도를 하나 배우게 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번뇌하는 이들에게, 무엇보다 인간미래를 따뜻하게 바라보고 싶은 나에게, 아이 웨이웨이의 태도가 미래를 향한 안전한 방어(defend the future)가 되어 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