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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lden Age Thingking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방

by Dani


우아한 사유의 시간


반가사유상의 자세는 모호하다. 고민을 끝내고 다리를 내려 가부좌를 풀려는 건지, 다리를 올려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들어가려는 건지 알 수 없다. 이 애매한 자세로 미소를 띤 반가사유상을 보고 있자니, 깊은 생각을 할 때 나의 모습은 어떠했는지 떠올리게 됐다.


나는 텅 빈 방에서 홀로 떠들고, 감정을 휘갈겨 쓴 일기로 생각을 정리한다. 내가 가진 불안을 토해내지 않으면 안됐다. 내면의 깊은 고민을 나만의 언어로 풀어내는 과정 그 자체가 치유였다.


그리고 그 끝에는 반드시 실재하는 사람과 대화해야 했다. 사유의 과정은 너무 외로워서, 누군가와 나누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생각에 ‘잠긴다’기 보다 ‘외친다’에 가까웠다고 해야할까.


하지만 누군가의 고민을 들어주는 것이 꽤나 힘든 일임을 알게 된 후로, 주절주절 내면을 꺼내 보이는 일이 조금 추하다고 느끼게 된 후로, 고민상담을 꺼리게 됐다. 또 무엇보다 스스로 변화하지 않으면 같은 고민을 반복할 뿐임을 깨달으면서 사유의 시간을 홀로 끝내기 위해 노력했다. 요즘은 고민 상담의 자리를 마음에 쏙 드는 작품을 찾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다.


최근엔 최찬숙 작가의 전시 <큐빗 투 아담>, 영화 <소공녀>, 아이유의 노래 <팔레트>가 그렇다. 내가 갖지 못한 재주로 내면의 고민을 표현한 작품에서 나의 이야기를 발견할 때,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나와 꼭 닮은 작품을 응원하고, 포스터와 굿즈를 구매하면서 구구절절 나의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위로받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형형색색의 반가사유상을 구매하고 사유의 방에 찾아가는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이유가 아닐까 짐작해본다. 우리 모두 굳이 꺼내지 않을 뿐이지 늘 사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그 사유의 과정은 누구에게나 외로워서 위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유의 방은 타인에게 나의 걱정을 덧붙이기 미안한 사람들의 고민상담소가 되고, 반가사유상은 주어진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는 사람들의 친구가 된다.








웃자, 힘들 때 웃는 게 일류다 !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입버릇처럼 ‘웃자, 힘들 때 웃는 게 일류다’라고 중얼거렸다. 전혀 웃을 수 없는 상황에도 행복하고 싶어서 그랬다. 웃음이 부재한 현실이 무서워서 그랬다. 스님이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듯, 힘들 때면 ‘웃자’라며 되내었다. 그렇게 끊임없이 노력하면 ‘웃자’고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웃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번민과 고뇌는 끝이 없었다. 대체 얼마나 더 노력해야 웃을 수 있을까 싶어 막막했고. 얼마나 더 성장해야 행복할 수 있을까 싶어 남은 생이 두려웠다.


늘 고민이 많은 내가, 반가사유상을 보았을 때 느낀 감정은 안도였다. 수행의 끝에 도달한 반가사유상이 미소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모든 사유의 끝에 권태나 허무가 아니라 웃음이 있음에 감사했다. ‘웃자’라고 외쳤던 지난날이 헛된 희망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었음에 안도했다. 나는 아직 번민하고 있으나, 그 수행의 끝엔 미소지을 수 있을 거라 믿는다.










누구나 사유할 수 있는 시대


혼자 중얼거리면서, 일기를 쓰면서, 누군가의 작품에서 나를 발견하면서 사유의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10대에는 ‘어떻게 살 것인가’가 주된 고민이었고, 20대에 들어서는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다. 늘 나 잘 살고 있는 건가 의심하게 하고 나의 행복을 방해하는 것들은 비슷하다. 내 생각이 틀렸다고 하는 이 시대의 가치들이나 나를 위축되게 하는 타인의 말 등이 그렇다.

이럴 때면 내가 다른 시대에 태어났으면 달랐을까? 하고 상상한다. 만약 조선시대에 노비로 태어났다면, 나는 천대받아 마땅한 사람이라며 체념했을까? 대영제국의 귀족으로 태어났다면, 행복한 삶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이 모든 상상은 날 때부터 행복하게 태어난 사람은 없다는 결론으로 끝난다. 그 어떤 시대의 그 어떤 사람이라도 자신이 처한 상황에 100% 만족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상처받지 않는 삶이란 없고, 상처받지 않아야 행복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타고 태어난 시대, 국가, 부모님, 외모 등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을 인정해야 한다. 21세기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은 나의 선택이 아니었고, 코로나로 꿈꾸던 대학생활의 절반을 집에서 보내게 된 것에는 나의 잘못이 없었듯 말이다.


나는 내가 타고 태어난 모든 것을 인정하고, 상처를 내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게 될 때 진짜 행복할 거라 믿는다. 그리고 이 치유의 능력은 행복할 방법을 스스로 찾으려는 사유의 시간에 있다.


2022년의 내가 반가사유상 앞에 서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의 고뇌가 지나갔을까 생각하면, 그 세월의 깊이에 압도된다. 그저 지금 이 순간 존재하고 사유할 수 있음에 감사하게 된다. 우리나라에 누구나 무료로 입장할 수 있는 <사유의 방>이 존재하는 것, 누구나 반가사유상이라는 미소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이 시대에 태어난 사람의 특권이다. 나는 내가 충분히 사유할 수 있는 시대를 타고 태어났음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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