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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로카가티아의 시대를 멋지게 늙어가는 법

나이 듦이 두려운 청춘

by Dani



01. 죽음과 죽어감에 관하여


생의 끝이 ‘죽음’ 임을 생각하면. 우리는 살아가고 있지만, 죽어가고 있다. 죽음이라는 끝은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기에 낯설지만 친숙하다. 나는 죽음이 두렵기보다,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무섭다.


지금은 건강하고 생기 넘치는 20대지만, 쭈글쭈글한 피부에 대소변도 제대로 가리지 못하고, 밥 한 끼 나 혼자 먹을 수 없게 늙어간다면 어떨까. 나는 그렇게 죽어가는 것이 두렵다. 늙고 병들어 추해질 것이 걱정된다.


흔히 나이가 든다는 것, 노화가 진행되는 것을 ‘추하다’라 여긴다. 나는 그래서 죽음이 두려운 걸까.


위태로운 아름다움. 우리의 고충이 여기에 있다. 죽음은 결코 피할 수 없다. 우리는 사라지기 때문에 아름답고 영원할 수 없어 고귀하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실을 늘 잊고 있다. 우리만큼 노화에 강력히 맞서려던 세대는 없는 것 같다. 그렇게 자나 깨나 몸에 신경 쓰면서도 우리는 몸을 제대로 깊이 들여다보진 않는다. 엄연한 사실을 사실이 아닌 것처럼 행동한다.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고약한 현실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못한다. 정맥류가 생기고 머리가 빠지고 검버섯이 피고 뼈가 약해진다.
샐리 티스데일,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루벤스, <아들 니콜라스의 초상> /알프레드흐 뒤러, <어머니의 초상>

나는 아직도 우리가 ‘미는 젊음을, 추는 늙음을 동반한다’는 고대 그리스의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노인이 시대별로 어떤 존재였는지 분석하며 노화와 추의 필연적 관련성에 대해 연구했다. 그중 여성 노인에 주목해 멋진 노인과 Pro-aging의 방법을 이야기하려 한다.


레포트 용으로 썼던 걸 가져온 거라 조금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죽음이 두렵고, 노화가 무서웠던 나를 다독이며 썼던 글이라 내 모든 게 담겨있어서.. 꼭 발행하고 싶었다. 나는 우리가 죽음을 향해 죽어가는 삶이 아니라. 멋지게 늙어가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









02. 여전히 칼로카가티아의 시대를 살고 있다.


아름다움을 뜻하는 kalos와 선함을 뜻하는 agatos가 합성된 단어인 칼로카가티아(Kalokagatia). 이 단어처럼 고대 그리스에서는 미와 도덕적 선함을 동일시했다. 그리스인들은 인간의 신체를 더 아름다울 수 없는 극한까지 끌어올렸고, 그것을 신의 몸으로 생각했다.


에로스는 “미 속에 생식” 한다. 아름다운 것 속에 육체와 영혼의 씨를 뿌린다. 육체적 생식은 자손을 낳아 인간을 불멸로 끌어올리고, 영혼의 생식은 지와 덕을 낳아 인간을 불후의 명성으로 끌어올린다. 이렇게 에로스는 타나토스를 이기고 우리를 영원으로 이끈다. [•••] 가령, 미소년 그리고 영웅. 이 속에서 육체와 영혼의 아름다움, 즉 아름다운 용모와 덕은 하나가 된다. 그것을 그리스인들은 ‘칼로카가티아(善美)’라 불렀다.
진중권, <미와 에로스>



에드윈 롱 Edwin Long , 다섯 명의 선택된 처녀(크로톤의 제욱시스)

트로이아 원정을 촉발시킨 헬레네의 빼어난 미모를 담기 위해 조각가 제욱시스는 다섯 명의 아름다운 처녀들에게 포즈를 취하게 했다. 그리고 그 다섯 명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을 각각 조합하여서 조각을 완성했다.


과거에는 아름다운 모습이 기껏해야 조각상 정도로 만들어졌다. 살아 움직이지 않는 무형물로 말이다.


매체가 발달하며 오늘날엔 TV, 핸드폰을 통해 아름다운 연예인들의 모습을 언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얼굴이 어떻다, 몸매가 어떻다는 평가를 실존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고, 실시간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전 세계에 전달된다. 각종 SNS를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남과 비교한다. 이미지 과잉의 시대에서 나도 모르게 시대가 정의한 미적 기준을 당연시한다.


현대의 여성들은 마치 여신상을 조각하듯, '눈은 김태희, 코는 한가인 …'과 같이 자신의 신체를 극한의 아름다움으로 끌어올리고자 한다. 최고의 아름다움을 조각하던 고대 그리스 조각가들의 일을 현대의 성형외과 의사들이, 실제 인간을 대상으로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음 사진은 프랑스의 행위 예술가 ‘생트 오를랑(saint orlan)’의 성형수술 프로젝트다. 그녀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턱, 퐁텐블로 파의 <다이아나>의 눈, 구스타프 모로의 <유로파>의 목, 장레옹 제롬의 <프시케>의 코, 다빈치의 <모나리자>의 이마 등 명화에 등장하는 미인의 얼굴을 자신의 얼굴에 재현했다.


생트 오를랑, <성 오를랑의 탄생>, 1978


오를랑은 <신체예술선언>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신체는 수정된 레디메이드가 되었다. 그것은 더 이상 과거의 고전적 이상으로 볼 수 없다." 한 마디로 자신의 신체예술은 유명한 도상을 차용해 베끼는 '키치'에 불과하다는 거다. 오늘날 대중들이 즐겨하는 미용성형 역시 실은 키치, 즉 도처에 널린 스타의 이미지를 베끼는 '레디메이드'다. 성형수술은 외과적 수술을 이용한 팝 아트에 가깝다. 워홀의 그림 속에서 마릴린 먼로가 수십 번, 수 백 번 반복되듯이, 거리에서 스타의 얼굴은 외과적 복제를 통해 수 없이 반복된다.



2018년,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던 웹툰 <내 ID는 강남미인!>은 외모지상주의와 성차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주인공 ‘강미래’는 어렸을 때부터 못생긴 외모로 트라우마가 있다. 또 성형수술 티가 많이 난다는 ‘강남미인 ’이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면서 다시 한번 상처를 받는다. 이 웹툰에는 외모지상주의를 고발하기 위한 다양한 악역이 존재한다. 무례한 외모 지적과 몰카범, 성차별적 발언을 일삼는 꼰대 등이 있다. 문제는 폭언과 성차별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못생긴 사회 부적응자처럼 묘사되고, 옳고 바른 말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매우 준수한 외모로 표현되는 것이다.


아름다운 것에 대한 추구는 인간의 본능이라고 하지만. 외모지상주의를 고발하는 작품에서도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은 예쁘고, 부정적인 이미지의 사람이 못생긴 것’이 여전히 그럴듯하게 느껴지는 것을 보면. 그리스의 칼로카가티아라는 선미(善美)의 개념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듯하다. 칼로카가티아의 영향력 아래에서 우리 삶의 가치는 도덕이 아닌 미학이 되었다.








03. 비투페라티오와 여성 노인


추함에 관한 철학, 의학, 문학 텍스트는 온통 여성을 다룬다. 움베르토 에코의 <추의 역사>에서도 ‘여성의 추’라는 챕터가 따로 있을 만큼. 그리스부터 르네상스까지, 서양 역사는 여성의 존재 자체를 추하다고 보았다.


특히 중세와 바로크를 거치며 여성의 추라는 소재는 큰 인기를 끌었다. 다음 한스 발둥의 작품을 살펴보면, 어두운 배경에 있는 네 명의 인물 중, 젊은 여인이 시선을 끈다. 창백하고 매혹적인 모습으로 다른 누르스름하고 어두운 색조를 띠는 인물들과 대비되어 또렷하게 도드라진다. 그녀의 오른편에는 한 초라한 존재가 머리 위로 모래시계를 들고 있다. 왼편에는 한 노파가 나타나고, 한 아이는 금발 미녀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있다. 이 알레고리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지만,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이 발간한 1896년 카탈로그는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노파를 ‘악’으로 , 젊은 여성을 ‘허영’으로, 아이를 ‘사랑’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말이다.


중세의 도덕주의는 여성적인 미에 대해 경계했다. 가부장적 사회였던 중세에 여성은 종종 천사처럼 순결한 이미지로 묘사되었다. 그렇게 19세기 말까지 미술사에서 여성은 남성의 시각에서 바라본 수동적 존재로 표현되었다. 팜므 앙팡(Femme Enfant) , 팜파탈(Femme Fatale)과 같이 열망하지만 다가설 수 없는, 오직 남성 상상력의 산물로서 기능했다. 그것이 아니면 여성이란 불완전하고, 불쾌하고, 가증스러운 존재였다. 이 시대의 추의 개념은 여성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사악함과 유혹의 해로움을 의미한다. 그래서 되도록 여성들을 피하라 말했다. 비투페라티오(Vituperation)는 여성에 대한 혐오를 포함하고 있다.



추함의 규범은 폭력과 학살로 이어진다. 대표적인 사례가 ‘마녀’다. 마녀는 당대의 교회와 의사들에게 위협적인 존재였다. 혼자 살았고, 아이가 없었다. 식물과 몸, 임신, 낙태에 관한 지식을 가졌다. 지식과 능력으로 스스로 어떤 지위를 갖게 된 독립적인 여성을 견제하기 위해 사회는 절대적 악을 체현하는 상징으로 마녀를 이용했다. 또한,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여성들에 대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남성은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1909년 프랑스 주간지 ‘라시에뜨 오 뵈르’에 실린 뱅&시그르의 풍자화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들’을 보면, 여성들은 나이나 실제 외모와 상관없이 늙고 못되게 그려졌다. 여성 혐오에서 시작한 추한 여성’의 개념은 사회적 통제수단으로 기능했기 때문이다. 추함은 성고정관념과 성역할을 강화했다.



미와 추의 속성은 종종 미학적 기준이 아닌 정치적, 사회적 기준에서 기인하기도 한다. 역사 시기에 따라, 문화에 따라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나는 추하다, 하지만 나는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살 수 있다. 그리하여 나는 추하지 않은 사람이 되는데, 추의 효과, 추의 절망스러운 힘이 돈에 의해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 내가 가진 돈이 나의 모든 결점을 그 반대의 것으로 전환시켜 주지 않는가?
마르크스, <경제학 철학 수고>, 1844



한 노인이 모아온 폐지를 싣고 고물상으로 들어간다

21세기 대한민국의 모습을 담아낸 책 <가난의 문법>에는 ‘가난의 할머니화’라는 챕터가 있다. 빈곤의 여성화, 즉 똑같이 가난한 노인 세대라지만 할머니들이 처한 조건은 더 가혹하다는 거다. 사회구조적 한계 탓에 제대로 공부하지 못했고, 전업 주부로 살았거나 일을 했더라도 공장 최하위 노동자 내지 서비스직 경력이 전부다. 쇠함이라는 변수까지 추가된 지금, 여성 노인들이 먹고살려면 카트를 끌고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다. 여성, 그중에서도 ‘여성 노인’은 오늘날까지 단 한 번도, 그 어떤 관점에서도 우위에 있었던 적이 없다.






04. anti-aging


플라톤은 스파르타의 장로 정치를 찬양했으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노년을 지혜도 정치적 능력도 없는 쇠퇴기로 보았다. 존경의 대상이면서, 조롱의 대상이라는 노인에 대한 이중적인 시각은 고대부터 쭉 이어졌다. 인류학적으로 보면 노인이 일종의 경계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중세에 숲 속에서 살던 노인들은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의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종종 이들은 그들의 외모 때문에 마법사와 마녀로 오인받기도 하면서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사람들의 병을 치료해주는 긍정적 역할도 동시에 수행했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사회로부터 일정 정도 격리되면서도 또한 사회가 필요로 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근대에 들어서며 도래한 합리주의와 경험주의, 과학문명은 노인과 늙어감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키웠다. 경제 가능 인구를 중심으로 국가가 운영되었기에 은퇴계층인 노인들은 소외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노인은 다른 사회 구성원들에게 부담을 안기는 존재가 되었고, 노화는 최대한 늦추고 거부해야 할 것으로 여겨졌다.


우리가 칼로카가티아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노화와 추는 필연적 연관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추를 단순히 칼로카가티아의 반대 개념이라 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지배적인 관념이 ‘미는 젊음을, 추는 늙음을 동반한다’ 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반 올브라이트,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대표적인 탐미주의 소설로 알려진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살펴보자. 그의 작품은 영혼의 죽음과 육체의 죽음을 연결시켜 이야기하고 있다. 주인공은 초상화는 영원히 젊고 아름다우나 자신은 점차 늙어간다는 사실에, 영혼을 바쳐서라도 영원한 젊음을 얻고자 한다.



그는 점차 자신의 미모에 반했고 자신의 영혼이 점차 타락하는 모습에 흥미를 느꼈다. 때로는 소름 끼치도록 기괴한 환희를 느끼면서, 때로는 죄악의 흔적이 더 끔찍할지 노화의 흔적이 더 끔찍할지 궁금해하면서 … 흉측한 선을 세심하게 관찰했다.
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그렇게 현실의 도리언은 아름다우나 타락해갔고. 초상화에는 그 영혼의 타락성이 드러난다. 재미있는 점은 그의 죄악이 늘어날수록, 초상화 속에 보기 싫은 주름과 검버섯이 생겨나며 표독하고 흉하게 ‘늙어간다’는 점이다. 악한 것은 추한 것이고, 오스카 와일드는 그 추악함을 노화로 표현했다.



현대사회에서도 젊음의 기호와 이미지를 상품화하는 소비전략을 이용해 늙음을 자연적 현상이 아닌 치유의 대상으로 가정하곤 한다. 특히 4,50대를 겨냥한 화장품 브랜드들은 더욱더 젊음의 가치에만 초점을 맞춰 anti-aging 제품을 홍보한다. 나이가 든 현실적 모습을 끊임없이 부정하도록 만드는 광고를 생산해낸다. 이는 모두 아름다움=젊음, 노화=추함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이 듦’은 나이가 이미 들었다고 인식되는 사람들만의 불안요소가 아니다. 늙음에 대한 부정적인 사회적 시선은 젊은 여성들에게도 부담감을 안겨준다.


좋음을 좋음으로 향유할 수 있는 시기는 ‘한때’이기에 나이가 들면 그것을 현실 앞에 모두 포기해야 하는 것처럼 현재의 즐거움을 한정된 자원으로 여기게 한다.





05. Pro-aging


고령화로 노인의 수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의료가 발달하고 기대수명이 연장되며 삶의 여유가 높아졌다. 노인층도 적극적이고 활기찬 생활이 가능하고, 경제력을 기반으로 높은 구매 수준을 갖출 수 있다. 이렇게 등장한 젊은 노인층(young silver)은 노인과 노년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었다. 이제 노인들은 침대에서 고통스러워하며 구원을 말하기보다는 자녀세대가 져야 할 책임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캉디드’나 ‘나의 아버지의 삶’에서 노인은 영웅들의 교육자로서의 역할을 맡았다. 노인은 지성과 덕성을 이룬 사람들이었다.


과학자 뷔퐁(Buffon)은 <인간의 자연사>에서 노년기를 신체가 수척해지고 서서히 노쇠해 가는 과정으로 묘사했다. 그러니 죽음이란 어떤 한순간에 닥치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지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노년기의 모든 순간이 죽음을 향해 가기 때문에 어떤 치명적인 마지막 순간이란 없다. 그렇기에 오늘날 젊은이들의 관심사는 anti-aging이 아니라, 죽음에 이를 때까지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는 pro-aging의 방법이다.


만 69세 여성이자 ‘밀라논나’(이탈리아 할머니)라는 이름의 80만 유튜버는, 우리나라 최초로 밀라노 유학길에 올라 페라가모, 도미니코 돌체와 함께 공부했고. 평생 패션 바이어로서의 커리어를 쌓으며, 그 시절의 워킹맘으로서 두 아이를 키워낸 강인한 여성이다. 그녀의 채널에선 60대의 할머니가 젊고 예쁜 뷰티 유튜버가 이야기할 법한 모닝/나이트 루틴과 패션 꿀팁을 소개한다. 놀랍게도 젊은 세대는 이에 반응했고, 열광했고 롤모델이라며 닮고 싶어한다. 그녀에 대한 2030세대의 뜨거운 관심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내가 젊어 보여야 할 이유가 뭐죠? 내가 40대에서 지금 67세가 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데, 왜 40대를 또 해요. 저는 항상 그걸 반문을 해요. [… ]굳이 염색할 필요가 없더라고요. '이제 성형수술 안 한다, 내가 이 주름 하나하나 생길 때마다 얼마나 많은 경험을 했는데'라고 말했던 엘리자베스 테일러처럼, 저도 제 경험을 지우고 젊어 보이고 싶지 않아요.
SBS 취재파일 밀라논나 인터뷰 중에서


밀라논나는 유튜브에서 본인을 소개하며 ‘삶에 찌들지 않은 상큼한 할머니’가 되고 싶다고 했다. 젊은이들이 노인들을 보면서 나도 나중에 저렇게 표정이 어두워지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하면 얼마나 싫겠냐고 했다. 늙어도 개성이 있고, 깔끔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다고 한다. 자신이 사랑한 패션을 매개로, 꿈을 지켜내며 치열하게 살아온 인생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청춘들에게 그녀는 유효한 위로와 조언으로 노년을 앞서 비춰주는 거울이 되었다. 일명 ‘밀라논나 현상’이라 불리는 폭발적인 영향력은 우리가 닮고 싶은 멋진 어른을 얼마나 기다렸는가를 보여준다.



비슷한 맥락으로 최근 화제가 되었던 배우 윤여정의 광고가 있다. 그녀 특유의 말투로 ‘옷 입는데 남의 눈치 볼 거 있니, 좀 이상하게 입는다고 뭐 법에 저촉되니, 입고 우기면 돼. 별거 없어.’ 라며 개성을 추구하라는 ‘힙한’ 메시지를 던진다. 누구보다 나 자신을 중시하고, 가치소비를 중시하는 MZ세대의 메시지를 70대의 배우 윤여정의 목소리로 전달한다는 것이 재미있다.

특히 마지막 대사인 ‘그니까 니들 마음대로 사세요 지그재그’는 브랜드 이름인 ‘지그재그’와 우여곡절에도 자신만의 길을 갔던 윤여정의 인생이 연결되며 엄청난 시너지를 낸다.


'삶과 쇼핑 모두 지그재그로'
윤여정의 입을 빌려서 발화됐을 때 더없이 멋있는 카피가 된다. 깐깐한 패셔니스타로 소문난 윤여정이기에 지그재그에서 옷을 사 입을 것 같지 않아 모델과 프로덕트 사이에 위화감이 드는 것은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여정을 모델로 발탁한 것은 많은 젊은 여성의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젊은 여성들이 그녀를 닮고자 하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 소소하게 '관념적 윤여정', '휴먼 윤여정체'가 인기를 끌기도 했듯, 그녀의 독특한 화법과 센스는 많은 MZ세대들의 감성을 건드리고, 그만큼 광고 모델 선정은 효과적이다.
김동희 평론가


이전의 모델이었던 젊고 아름다운 배우 한예슬의 광고보다, 윤여정의 광고가 더 큰 파급력을 가져온 데에는 이유가 있다. 윤여정의 목소리가 왠지 시대를 앞서간 멋진 여성의 조언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지그재그의 주요 이용고객인 젊은 여성들이 그녀를 롤모델로 꼽으며 닮고자 하기 때문이다. 젊은이들만의 영역이라 여겨지던 곳에 멋진 노인들이 드러 서고 있다. 이렇게 밀라논나와 윤여정처럼 멋진 여성 노인들이 주목받는 걸 보면 칼로카가티아와 비투페라티오의 시대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생긴다.








06. 아름다움은 자란다


이전 장에서 보았듯, 사회가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동안과 안티에이징을 내세우던 화장품 회사들이 이제는 젊음과 아름다움을 동일시하는 사회에 화두를 던진다. 2020년, 아모레퍼시픽의 뷰티 브랜드 ‘설화수’는 영상 캠페인을 통해 ‘아름다움은 한순간에 머무르지 않고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고 깊어진다’라는 브랜드 철학을 전했다.


'나이는 못 이긴다.' 일상에서 자주 등장하는 문장이다. 이는 여성의 나이 듦에 대해 이 사회가 어떤 시선을 가지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앞선 장에서 보았듯, 지금껏 화장품 브랜드들의 초점은 ‘anti-aging’, 나이를 이기고 노화를 늦추는 방향에 맞추었다. 이에 정경화는 나이를 왜 이겨야 하냐고 반문한다. 실제로 그녀는 사회가 정의한 생애 주기와 타협하지 않는 길을 택했다. 레전드라는 타이틀을 넘어 현역으로서 끊임없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그녀의 아름다움은 자라고 있다.


아름다움을 ‘자란다’라는 관점에서 보면, 노화를 거부할 필요가 없다. 시간을 통해 변화를 겪는 건 육체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내면도 시간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한다. 그렇게 정신적 성숙을 이룬다. 노인의 시기는 인간으로서 인격 완성도가 가장 높고 정신적으로 성숙한 시기라 볼 수 있다. 탐욕을 조절하며 지혜를 발산하는 노인은 사회를 발전시킬 주동체가 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노년기야 말로 진정 지덕을 겸비한 고대 그리스 칼로카가티아의 이상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노화학자인 마크 윌리엄스는 젊음의 활력을 유지하는 것이 행복한 노년이라는 생각은 착각이라고 했다. 노년은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삶의 일부이자 현재의 연장선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노화가 두렵지 않고 죽음이 두렵지 않다. 죽음을 향해 죽어가는 노년을 보낼 것이 아니라, 깊은 지혜와 연륜을 더해 아름다움을 키울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 인생의 황혼기에 마주할, 새로운 별들이 기대된다.


나이 듦은 젊었을 때보다 못한 기회가 아니다. 다만 다른 옷을 입었을 뿐. 저녁 황혼이 스러져갈 때, 하늘은 낮에는 보이지 않는 별들로 가득하다.
<롱펠로우, 모리투리 살루타무스>








참고자료


움베르토 에코, <추의 역사>

클로딘느 사게르, <못생긴 여자의 역사>

셀리 티스데일, <죽음과 죽어감에 관하여>

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아트인사이트 [Opinion] 늙음을 부정하는 우리를 위한 이야기

아트인사이트 [Opinion] 아름다움은 자란다: 안티-에이징에서 프로-에이징으로

곽동일(Dong-Il Kwak).(2001). 어떻게 잘 늙어가는 분이 新老人인가. 노인정신의학, 5(2) 105-112

허철행. (2016). 동서양 사회복지 사상과 노인복지. 동양문화연구, 23, 121-148.

윤영숙. 동서양의 덕윤리에 관한 인문학적 접근. 국내석사학위논문 부산교육대학교 교육대학원, 2016. 부산

권애리 기자, [SBS취재파일] 밀라논나 현상-'우리의 내일'을 기대하게 하는 '52년생 장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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