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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iel J Jan 12. 2024

<왓칭> 자기계발서와 유사과학

유사과학 스파게티

내가 자기계발서를 읽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적어보다가 유사과학도 같이 문득 떠올랐다. 그리고 자기계발서+유사과학 범벅덩어리 었던 어떤 책에 대해서 기억을 끄집어냈고 이에 대해서 적어보자 한다.


0. 들어가며

첫 번째로 이 책에 대한 모든 내용을 부정하자는 것은 아니다. "나를 제삼자처럼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볼 것" 감정적으로 격동할때 화나고 슬픈 상황에서도 제법 효과가 잘 드는 좋은 방법인 것은 분명하다. 나의 미래를 그려보고 그에 맞게 행동하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것을 삶의 모든 범위에 적용하려 든다는 점이다. 이게 왜 문제가 되는가? 제삼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을 모두 적용할 수 있지 않는가? 반문하겠지만 저자는 자신의 말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유사과학을 끌고 오며 실제로 멀쩡히 작동하는 과학을 비틀어서 해석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냥 담백하게 어떤 유사과학을 끌고 왔는지 살펴보자


나는 왓칭을 고등학생 때 한번 읽었고 이후로는 대학교때 그러니까 군대 갔다 와서 다시 보게 되었다. 고등학생 때 <왓칭>을 처음 읽었을 때는 몰랐지만 대학생때 이 책을 주제로 글을 쓰기 위해서 집어 들었을 때는 나름 비판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는지 유사과학을 남발하는 지점부터 거부감이 들었다. <왓칭>의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유사과학을 남발하며, 애써 과학적이지 않은 분야를 과학으로 포장해서 신뢰성을 보이려고 노력하는 추태를 부렸다. 특히 양자역학에 대한 이해도 없으면서 양자역학을 가지고 관찰자 효과라는 둥 <왓칭>을 설명하는 것은 비전공자인 나에게도 과학에 대한 모욕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마치 1980년대 포스트모더니즘과 함께 사회운동가들과 사회과학자들이 과학은 과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며 과학계에 진출하면서 보였던 행태를 보는 것만 같았다. 여기까지 보았다면 알겠지만 나는 <왓칭>이란 책의 인상은 ‘어 뭐가 이상한데’ 하는 수준의 의심이 아니라, 원색적인 거부감이 먼저 들었다. 지금부터 하나씩 따져보자


1. 에너지장 촬영장치와 키를리안 사진기


<와칭>에서는 특이한 사진기를 하나 소개를 한다. 에너지장 촬영장치를 가지고 보면 우리의 감정이 사진으로 포착을 할 수 있으며감정과 건강상태에 따라 에너지장의 형태와 색깔이 변화한다고 하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틀렸다다른 것이 아니라완전히 오답을 냈다러시아의 전기공 세묜 키를리안 (Semyon Davidovich Kirlian) 1939년 우연히 발견한 현상으로그 해 개발한 사진 기법의 명칭으로 원리는 고주파 고전압의 전기를 피사체에 가했을 때 피사체 주변으로 희미한 발광 현상이 촬영되는 것을 말한다.

에너지장 촬영장치와 키를리안 사진기

이런 발광 자체는 초자연 적인 아닌 절연체로 분리된 두 전극 사이에 특정 크기의 전압이 걸렸을 때 나타나는 ‘코로나 방전’ 현상으로 인해 나타나는 것이다. 두 전극 사이의 전압이 작으면 전류가 흐르지 않고, 전압이 너무 크면 절연 파괴가 일어나 마치 번개처럼 번쩍이며 절연체를 통과해서 전류가 흐르는데, 전압의 크기가 절연 파괴를 일으키기에는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애매한 크기일 때에는 전극 주변에 있는 유체가 부분적으로 이온화되어 부분적으로 이온화되어 플라스마 상태가 된다. 이때 형성된 플라스마로부터 희미하게 빛이 나는 현상이 ‘코로나 방전’ 현상이며, 이것이 사진으로 촬영되는 것이 키를리안 사진이다.


유사과학(擬似科學)에서는 이를 두고 키를리안 촬영 기법으로 인체를 촬영할 때마다 코로나의 밝기, 색깔 형태가 다르게 나타는 것을 두고 그 사람의 건강 및 심리 상태가 나타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오라는 객관적, 외적,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생리학적 심리학자에게 부 후-이미지라고 알려진 망막 상태의 의식의 결과이다. 이러한 견해에 입각해 보면 오라는 환상이나 환각이 아니라, 차라리 외부 물체의 존재에 해당하는 것이 아닌 어느 정도 지각자의 일시적인 생리적 망막 상태에 해당하는 주관적인 감각 또는 공유하지 않은(unshared) 지각이다."[1] <왓칭>에서도 유사과학이 다루는 방법과 완전히 일치하게 이용을 하고 있다. 하지만 진실은 방전 시 전압의 미세한 차이 및 방전 순간 피사체 주변의 유체의 조건에 따른 플라스마 온도가 차이가 사진에서 코로나의 색깔 및 밝기의 차이로 나타는 것뿐이다. 한마디로 인간의 감정이 아닌 주변 환경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실제 키를리안 사진의 모양 등을 결정하는 인자는 대단히 많으며 보통 이것이 통제되지 않은 상태로 사진을 얻는다. 흔히 장치, 검체 및 환경, 필름과 사진 과정, 그리고 사진 이미지의 해석에 관여되는 적어도 22가지의 파라미터가 통제되어야 동일한 사진을 얻을 수 있는 것이 키를리안 사 진법이다.”[2] 그리고 인간의 감정을 촬영할 수 있는 사진기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잘못된 사실은 <왓칭> 책에서 뿐만 아니라 여러 인터넷에 떠도는 정체불명의 카메라가 나오는데 이런 유사과학이 아무런 검증 없이 실렸다는 사실은 안타깝다. 


[1] Geoffrey Dean, Physiological Explanation of Human 'Auras', Skeptical Inquirer, Summer 1991, p. 402-403.

[2] Arleen J. Watkins and William S. Bickel, A Study of the Kirlian Effect, in The Hundredth Monkey and Other Paradigms of the Paranormal, Kendrick Frazier, ed., Prometheus Books, Buffalo, New York, 1991.



2. 물은 답을 알고 있다


이후 바로 나오는 이야기로 너무나도 유명한 "물은 답을 알고 있다"의 유사과학이다. 물의 결정체와 누룩을 가지고 우리가 어떻게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이것들이 반응을 하고 좋고 예쁜 말을 하는 물은 결정이 예쁘고 누룩의 경우 누런 누룩으로 변하였으나, 악담을 하고 거친 말을 하는 물과 누룩은 각각 이상항 형태의 결정과 검게 썩어 악취를 풍겼다고 말한다. 사실 다 거짓말이다. 애초에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보았을 때, 듣기 좋은 말이라는 것의 정의도 모호하다. 단순히 그것이 음색뿐이라면 기분 나쁜 말도 좋게 들리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것의 유레는 일본에서 2001년에 출판하고, 한국에는 2002년에 첫 번역된 서적. 원제는≪水は答えを知っているその結晶にこめられた メッセージ≫(물은 답을 알고 있다 그 결정에 담겨 있는 메시지)에서 시작되었는데 책의 주장은 “좋은 말을 하고, 나쁜 말을 줄이면서 물을 통해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자. 우리의 몸도 70%가 물이기에 물과 마찬가지로 좋은 말을 할수록 몸에 좋다.” 철학적인 의도는 좋다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주제에 대한 근거가 허무맹랑한 것을 내세우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책의 내용을 보면 일본 신토의 황조신(皇祖神) 아마테라스의 이름을 발음하면 물의 결정이 예뻐진다는 허무맹랑한 주장도 있다. 국내에서도 이 책이 유명해진 이유는 한 때 베스트셀러로 팔리고 중고등학생 권장도서에도 실렸으며 이것은 현재 진행형이다. 나도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정규과정 중에 이런 것을 본 것이 기억이 나며, 비교적 최근의 일로는 군대에서 양파 뿌리를 가지고 물에 담가 놓고 뿌리가 가장 길게 자란 분대를 꼽아서 전화 5분 시켜준다고 해서 분대원들은 별짓을 다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어떤 것은 천장에 달아 놓아서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하고 물에도 담가 놓지 않았는데 나중에 뜯어보니 허공에서 제일 많이 자랐다. 물론 이 물이야기는 한국뿐만이 아니라 책을 출판한 일본에서도 세계적인 유사과학 취급을 받는다.


책의 저자는 에모토 마사루(江本勝, 1943-2014)는 일본의 요코하마 시립대학 문리학부 국제관계학을 전공한 사람으로, 애초에 과학자도 아니다. 과학은커녕 문과 출신으로 이공계 논문 한편 쓴 적 없다. 비전공자가 쓴 헛소리가 너무나도 사회에 깊게 박혀있다. 물은 지구의 시작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뭐가 좋고 나쁜지를 안다는 식의 주장인데, 물은 무언가를 기억할 지능이나 기관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제껴두고더라도 물 말고도 거의 모든 분자가 똑같이 지구상에 있었다. 간혹 지구 외부에서 유입되는 극소수의 물질이 있지만 이는 우리 주변에는 거의 발견될 확률이 없으니 넘어간다면, 물이 아니더라도 탄소를 예를 들면 지구와 함께 대지의 흙의 일부였다가 퇴적이 되고 엄청난 압력과 열에 의해서 마그마가 되고 미그마가 화산 폭발로 분출되었다가 물과 만나 바로 식어 둘이 되는 과정을 반복하였으니 마찬가지이다. 물을 전기 분해해서 수소와 산소로 만들면 이것은 어떻게 되는가? 원래의 것을 기억하는 형성합금 같은 존재인가? 실험과정도 엉터리이다. 파동에 의한 물의 결정이라고 했지만 실상은 그저 워드로 작성한 뒤 인쇄한 쪽지를 붙인 거였다. 거기에다가 실험을 하며 사진을 여러 장 찍은 다음 나쁜 말을 적은 물에다가는 못생겼다 싶은 사진만 골라내고 반대로 좋은 말을 적은 얼음에서는 예뻐 보이는 것만 골라냈다. 최소한 뭐가 예쁘고 못생긴 것인지에 대한 기준조차 없다. 편한 데로 취사선택을 한 엉터리 실험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리고 이 주장의 가장 큰 잘못된 이유는 과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학은 최소한 그 근거와 자료의 신빙선에서 시작하지만 이것은 그것마저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 조건이 충족된 다음 단계의 가설의 정확성, 논증 과정의 정확성 다른 가설의 검토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이 것은 근거와 자료부터가 신빙성이 없다. 실험방식조차 믿지 못한다. 정말 만에 하나 주장이 맞더라도 그것을 뒷받침할 근거와 가설을 믿을 수 없다는 그것은 다시 말해서 과학이 아니다. [1]


유사과학은 이것을 넘어서 식물에게도 감정이 있어서 헤미메탈 같은 소음이나 욕설 같은 안 좋은 말을 들으면 잘 안 자라고 클래식 같은 조용한 음악을 들려주면 잘 자란다고 하는 주장이 있다. 음악적 취향을 선과 악으로 연결하는 논리적인 비약을 넘어서 좋고 나쁨이라는 것은 개인에 따라 달라지는 주관적인 기준이라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척도가 될 수 없으며, 무엇보다 식물에는 귀가 없다. 동물과 유사한 기관과 구조가 없으며, 청각기관이 있을 리 만무하다. 이 실험 역시 아무런 근거가 없으며, 유사과학의 특성상 변인통제가 없어서 실험이라고 불러주기도 민망하다. 나긋하게 욕설하고 큰소리로 칭찬을 해주면 어떨까? 반대의 결과가 나올까?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 일까? 그 어느 것도 답변을 할 수 없다. 반례로 미국디스커버리 채널의 인기 쇼인 Mythbusters에서 비슷한 실험으로 거의 동등한 조건인 온실에서 키운 식물에게 한쪽엔 클래식을, 한쪽에는 헤미메탈을 들려줬는데 헤비메탈 쪽이 더 잘 자랐다고 한다. 아마 음파가 식물을 자극하지 않았나라고 추측하면서 방송은 끝난다.


밥풀과 누룩의 출처는 MBC 한글날 특집 다큐멘터리에서 밥풀을 가지고 실험을 재현하려고 하였으며 한쪽에는 고맙습니다. 를 들려준 밥풀 핀 곰팡이는 하얗고 뽀얀 곰팡이로, ‘짜증 나’라는 말을 들려준 곰팡이는 검게 되었는데, 결국 둘 다 곰팡이가 난 것이고 그뿐이다. 하얗고 뽀안 것이 좋고, 검은 것이 나쁘다는 주관적인 판단이 과학적인 기준이 전혀 될 수 없으며, 이것부터 이미 과학적이라고 말하기 힘드니 합리성 역시 기대할 수도 없을 것이다. 내가 이것들을 대한민국 교육의 정규과정과 공중파방송에서 본 것을 생각하면 끔찍하다는 말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1] 과학계의 황홀한 사기극 — 정재승 교수의 《물은 답을 알고 있다》



3. 염동력


<왓칭> 33p에서는 염동력 실험을 예로 들었는데 런던 대학의 해스티드(John Hasted) 교수는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하였다. 천장에 여러 개의 열쇠를 매달아 놓고, 어린이들에게 각기 90센티미터에서 3미터 까지 떨어져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힘을 측정하기 위해서 작은 신장계(strain guage)를 부착해 놓았다. 그리고 결과를 확인해 보니 거리와 관계없이 전압펄스 그래프가 최고 10 볼트까지 치솟은 것을 들며 생각만으로도 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사실일까?



해스테드는 일단 염력을 믿는 사람이었다. 그는 유리 겔러를 비롯한 다른 심리학자들에 의해서 수저를 구부리는 행위는 속임수가 아니라고 지지하였다. 반면에 1987년 미국 국립 과학 아카데미에 의한 보고서는 해스테드의 비정상적인 주장을 조사하고 헤스티드를 속이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의 손에 놀아난 순진한 태도를 꾸짖었다. 더불어 1974년 겔러와의 테스트 조건도 속임수일 수도 있다고 쓰였다. [1] 


<왓칭>에서 소개한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 대해서 코멘트한 것을 찾아보았다. 영국의 물리학자 존 테일러(John Taylor)는 The Metal Benders(1981년)에게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테일러에 따르면 금속 벤딩 테스트는 제어력이 좋지 않았고 헤스티드는 일부 테스트의 피험자와 같은 방에 있지 않았다. 테일러는 "시험은 빈틈 투성 었고 추측된 이론은 엄청나게 어리석다"라고 썼다. 덧붙여서 헤스테드는 평행우주에서 개인으로부터 텔레파시를 통해 초자연적인 효과가 발생한다고 했지만 이를 뒷 받침 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했다. [2] 


다른 사례를 보면 1977년 12월 19일 Grenoble에서 과학적인 조건으로 테스트되었으며 그 결과는 부정적이었다. 제임스 라딘에 따르면 , 테스트 중 Birkbeck College North는 맨손으로 금속 샘플을 구부린 것으로 관찰되었다. 라딘 박사는 해스테드가 자신의 순진함과 신뢰를 이용해 저지른 범행이 얼마나 무모하고 잔인하며 포식적인 행동이었는지를 인식하지 못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3] 


헤스테드는 과학적인 설험의 규칙도 지키지 않았으며, 그저 순수하게 염동력을 믿으며 결과를 짜 맞추었다. 이런 사람의 1970년대의 이런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오늘날까지 전해저 온다는 것이 유감일 뿐이다.


[1] Kendrick Frazier. (1990). The Hundredth Monkey and Other Paradigms of the Paranormal. Prometheus Books. pp. 159–160. ISBN 978-0-87975-655-0

[2] John Taylor. (1981). "The Metal Benders by John Hasted". New Scientist. p. 438.

[3] James Randi. (1982). Chapter Off the Deep End in Flim-Flam! Psychics, ESP, Unicorns, and Other Delusions. Prometheus Books. ISBN 0-87975-198-3



4. 이중슬릿 실험과 양자역학


읽으면서 제일 경악을 했던 부분을 하나 꼽아 보아라고 하면 이것이다. 비록 물리전공자는 아니지만 고등학생때 물2를 선택할만큼 과학을 좋아하고 대중과학서를 많이 읽은 덕에 다른 사람에게 설명을 해줄 수준이다. <왓칭>에서는 그저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기 위해서 양자역학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하이젠베르크

잠깐 물리시간으로 넘어가서 양자역학 맛보기를 하자면 하이젠베르크가 대학교 교수시절 원자의 구조 형태를 강의를 하고 있었는데, 내용이 너무 어렵자 한 학생이 이렇게 질문을 한다. “그냥 완전 성능 좋은 현미경을 만들어서 직접 보면 안돼요?” 처음에 하이젠베르크는 이 말을 듣고 그럴싸하게 들려서 연구를 해보았으나 이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얻었는데 우리가 사물을 관찰하는 것은 반사된 빛을 관찰하는 것이다.


가시광섬 범위

그리고 우리가 눈이 포착할 수 있는 파장대를 ‘가시광선’이라고 한다. 원자는 이 가시광선의 파장보다도 작기 때문에 반사되는 것이 없고 이는 관찰을 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파장의 길이와 에너지의 크기는 서로 반비례하는 관계이다. 파장이 짧을수록 에너지는 강해진다. 원자를 때리고 나올 정도로 짧은 파장이라면 반사된 파장을 관찰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순간 강력한 힘을 맞은 원자는 어디로 이동할 것이고 우리가 관측했던 그 원자는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것을 두고 우리는 위치와 에너지를 동시에 관찰할 수 없다는 의미에 나온 것이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이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사고 실험

그렇게 계속해서 들어가면 우리가 미시세계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원자가 그곳에 존재할 확률이다. 실제로 미시세계에서는 확률로 모든 것이 돌아가는 지점이 나타나게 된다. 뉴턴역학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이후 이런 불확정성, 확률론적에 대한 기존 과학계는 거부감이 심하였다.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말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며 슈뢰딩거는 확률론적인 주장을 비꼬기 위해서 사고 실험을 한 가지 제안하는데 그것이 바로 슈뢰딩거의 고양이 사고 실험이다. 실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상자 안에 고양이 한 마리와 50%의 확률로 붕괴되는 원소 장치와 원소가 붕괴되는 것이 감지되면 독극물이 깨져서 나오는 장치가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고양이의 생존 확률은 몇% 인가? 확률론적으로 말하면 고양이의 생존확률은 50%인데, 그렇다면 고양이는 지금 죽은 상태인가? 살아있는 상태인가? 아니면 죽은 상태와 살아 있는 상태가 공존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죽은 상태와 살아 있는 상태는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죽어있으며 살아있는 상태가 공존하는 건 생각하는 것조차도 어렵다. 하지만 확률론적으로는 이게 정답이다. 여기에서 관찰자가 상자를 열어서 고양이가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 확인할 때에 고양이는 생존확률 50%에서 100%(살아있음) 또는 0%(죽어있음)로 어느 한 가지 상태가 확정이 된다. 이 것을 두고 관찰을 하고 있을 때는 중첩되지 않고 확정이 된다는 것이다.


이제 본래 이야기인 이중 슬릿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이중 슬릿 실험은 다음과 같다. 두 군데의 슬릿(Slit)이 뚫려 있고 거기를 향해서 미립자들을 발사한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 한 점은 사람이 보고 있을 때와 사람이 보지 않을 때 형태가 달랐다는 점이다. 사람이 보고 있지 않을 때는 물결 형태 마치 파장처럼 움직였지만, 사람이 관찰을 하고 있을 때는 야구공이나 총알처럼 일직선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왓칭>의 저자는 미립자의 나의 생각을 읽을 수 있으며 보는 사람이 저것은 고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렇게 나타나며, 나의 생각이 미립자에 전해졌다는 둥 이야기한다. 그래서 관찰자 효과(observer effect)라고 실제 있는 단어를 가져오지만 이는 명백히 틀린 설명이다. 위에서 설명했던 슈뢰딩거의 고양이 사고 실험처럼 관측하는 동안에는 고양이는 살아있거나 죽은 상태가 100%로 확정이 되지만 그렇지 못할때는 그 중간 상태로 중첩된 것이다. 미립자를 내가 고체라고 생각해서 고체처럼 움직인 것이 아니다. 관찰을 하고 있지 않을 때는 확률론적으로 어디에든 있는 것처럼 보이며 이는 파동의 형태로 나타난다. 다만 사람이 관찰하고 있을 때는 직선으로 나아가는데 미립자가 나아가는 매 순간 100% 확률이 중첩되지 않고 결정되기 때문이다. 관찰을 하는 사람이 아무리 편견이 없거나, 개념을 모르는 신생아를 데려다가 놓아도 관찰하고 있다는 그것 만으로 확정되고 직선의 형태로 나타난다. 사람이 보고 있느냐 아닌가에 다라서 실험의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저것이 내가 고체라고 생각해서 고체처럼 행동하였다고는 볼 수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을 뒷받침할 실험도 없으며, 저자는 하나의 사실을 가지고 좋을대로 해석한 것뿐이다.


다시 정리하자면 관찰자 효과(observer effect)는 관찰자가 어떤 개념을 가지고 바라보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바라보는 그 자체만으로도(하다 못해 카메라를 가져다 놓아도) 성립하는 개념이다. 양자 파동 함수 ψ와 양자 측정 과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니 이런 아무 말 대잔치가 벌어지고 있다.


좋은게 좋은것은 없으며 아닌 것은 아닌거다. 다시 말하지만 의도가 좋다한들 유사과학, 사이비과학을 끌고 오는것을 용납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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