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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어떻게 읽을 것인가

시간순으로, 인물별로 그리고 나를 위하여

by Daniel J

내가 철학을 왜 읽었던가 적어보았을 때 쉬운 시작과 철학에서 위로를 받았다고 하였다. 어떻게 읽을 것인지에 대해서도 왜에 적었던 이유를 다시 어떻게로 옮길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이 어려운 것이 아니다
어렵게 시작할 뿐

얇고 쉬운 것부터 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경우 철학은 다소 선행지식은 필요할지 몰라도 수학처럼 단계적인 난도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리고 철학을 깊게 알면 좋지만 우리는 학문적인 차원에서 관심을 가지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결국 철학서간 차이는 설명의 길이와 깊이의 차이에서 나온다. 똑같은 주제를 다루는 철학서가 두꺼운 책에 있는 것과 얇은 책의 내용이 다르지 않다. 다만 쉬운 것을 선택하면 철학의 내용을 쉽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왜곡이 일어나거나 옮겨 쓰는 사람의 사견이 들어갈 위험은 있지만 여러 권을 보다 보면 어떤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첨언하자면 역사서도 마찬가지이다.


한 번쯤 보았을 "처음 만나는~/시작하는~" 등의 철학서적이 있을 것이다. 이런 책은 기본적으로 전공자를 위한 전문서적이 아닌 이상 책의 타깃은 일반 대중으로 가능한 많은 사람을 노린다. 그러니까 철학에 배경지식이 없는 문외한 사람에게 맞춰진다는 의미다. 그렇기 때문에 설명하고자 하는 철학가의 생애와 철학이 의미하는 바, 목표 등을 명확하게 설명할 가능성이 높다. 일종의 쉬운 해설서다. 그리고 내가 이런 책으로 개괄적인 철학의 시대상과 어떤 것을 주장하는지 알게 되면 점점 읽는 속도가 붙을 것이다. 앞서 얻은 배경지식 덕분에 특정 부분은 집중해서 깊게 읽지 않아도 쉽게 읽히거나 과감하게 넘어가도 전혀 지장이 없다. 그렇게 계속해서 나아가면 된다.


여러분이 비단 철학뿐 아니라 어떤 역사나 종교에 관한 서적이 읽고 싶은데 아는 게 없다면 무조건 얇고 설명이 쉬운 말로 된 책부터 읽으면 된다. 책 앞에서 체면치레 할 것도. 쉬운 책을 읽는다고 누군가 비웃지도 않는다. 정말 만약에 그렇게 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지적하는 사람의 문제다. 읽고 싶은 한 번쯤 도전해보고 싶은 책이 있지만 어렵다고 좌절할 것은 없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도 비슷한 주제를 많이 읽다 보면 비슷한 내용이 계속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빨리 읽는 것처럼, 잘 읽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의 경우 읽기 능력 자체가 타고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시간 순서로 원하는 대로

앞에서 철학은 세상을 설명하고자 하는 열망이라 하였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을 다듬는 과정이라 하였다. 위키백과나 철학을 사전적으로 찾아보면 고대-중세-근대-현대철학으로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고대철학의 시작은 대게 우리에게 친숙한 그리스로마신화에서 시작된다. 그 당시 대게 어떤 자연재해가 일어났다고 가정해 보자 밖은 번개가 치고 폭풍이 몰아친다. 그러면 그것을 관장하는 신, 가령 포세이돈이나 제우스가 화가 나서 그런 것이라 여겼다. 이를 미토스(Mythos) 줄거리, 서사로 설명하고자 한다. 이제 한번 자연재해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신화를 빼보자. 이성에 기대어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근거를 찾아보자. 이를 로고스(Logos) 이성과 진리로 풀어보자는 것이다. 지금 시점으로 보았을 때 나름 고대철학자들이 내놓은 답은 엉터리인 경우가 많다. 뇌의 역할을 피를 식히기 위한 냉각장치 같은 것이라거나 사과가 땅에 떨어지는 이유는 그저 물체는 아래로 향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로 밖에 답을 하지 못하였다. 엄밀한 지식체계와 과학적인 도구가 없었던 시절이다. 그렇다고 의미가 없는가? 전혀 아니다. 우리가 아무런 도구도 없을 때에 어떻게 어디까지 생각하고 상상할 수 있는가 그 상상력은 어디까지인지 철학은 옛날 오래전 고대에서 시작한 질문에 대해 각 시대별로 답을 해주는 과정이다.


계속해서 가보자 이제 중세시대로 왔다. 로마는 기독교를 탄압하였지만 결국 밀라노칙령으로 로마의 국교는 기독교가 되었다. 그간 그리스 철학은 이제 기독교의 교리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렇다면 중세철학은 기독교에 잡아먹혀 전혀 발전하지 못하였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토마스아퀴나스, 아우구스티누스 오늘날까지 영향을 끼치는 철학대가들이 나오며 신학과 철학이 분리되며 정교하게 다듬어지는 결과를 얻었다. 그 밖에도 기독교 철학을 설명하기 위해 발전한 여러 것들은 오늘날 주요 철학의 토대를 이루었다.


기독교에서 중요한 키워드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하나를 꼽는다면 "자유의지"다. 교회를 다니지 않더라도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이야기를 알 것이다. 신은 모든 것을 해도 되지만 딱 한 가지 금할 것을 명하는데 "선악과를 따먹기 말 것" 만약 신이 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하려면 얼마든지 많은 방법이 있다. 선악과를 물리적으로 지워버린다거나 접근할 수 없는 곳에다가 달아버리면 된다. 하지만 그 순간부터 "선악과를 따먹기 말 것"이라는 명령은 의미가 없어져버린다. 부정할 수 없는 명령은 선언일뿐이다. 대상에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선택지가 주어질 때 비로소 동작하게 된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을 것인지 말 것인지 선택할 수 있으며 여기서 우리는 자유의지를 볼 수 있다. 오히려 신은 사랑하였기에 선택하는 자유를 주었다고 한다. 그것이 자신에게 반하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자유의지에 관한 논의는 이걸로 끝났는가? 물론 아니다. 근현대로 넘어와서 고전역학이 발전하고 지구차원이 아닌 우주 행성 단위의 움직임도 예측을 하고 맞아떨어지자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사람의 행동을 계산할 수 있다면 어떨까 마치 라플라스의 악마처럼 모든 것을 알고 계산을 한다면 미래를 알 수도 있지 않겠는가? 사람이 어떤 것을 선택을 하기도 전부터 이미 결정되었다면 이는 자유선택이라고 할 수 있는가?


철학은 이런 것이다. 질문에 대해 답을 하고 답에 대한 또 다른 질문이나 더 나은 대답을 찾으며 계속해서 나아간다. 계속해서 나아가면 된다. 이런 흐름을 보는 것은 다른 것도 마찬가지인데 역사는 보통 필연적으로,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의 나열이며 종교와 철학 역시 시대의 흐름에 부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한 역사, 종교나 특정 학파의 철학이 쇠락하면 반대쪽에 있는 분야가 반사이익을 얻는다거나, 프로테스탄트(개신교) 청교도의 교리를 알고 있다면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 정신'이라는 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목만 봐도 알아차릴 수 있다. 이렇게 확장이 일어난다.


20250216_161741.jpg 독서모임에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설명하기 위해 적은 낙서장


철학 키워드 별로

이제 내가 특정 철학이나 어떤 철학자를 본격적으로 살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대중적인 수준보다는 보다 높은 수준에 올라왔을 것이다. 이때부터는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일반적인 교양처럼 가볍게 접근하기보다는 다소 '공부'하듯이 접근할 필요는 있다. 그냥 쭉 읽기만 한다면 다소 아쉬운 지점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까 바로 그 철학자가 직접 쓴 책을 차례대로 보기 시작하면 된다. 그렇다면 또 궁금한 점이 생길 것이다. 철학자가 딱 한 권의 저서를 남겨놓지는 않을 것이다. 여러권에 걸쳐서 적어두었을 것인데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 니체는 친절하게도 어떤 순서대로 보라고 안내를 해주거나 검색을 하면 읽는 순서가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다. 어떤 철학자는 그 철학이 전기철학과 후기철학으로 변하고 나누어진다. 내가 만약 어떤 흐름으로 철학이 변하였는지 알고 싶다면 철학자가 쓴 책을 시대별로 또는 보편적으로 철학을 읽는 순서를 찾아보며 따라가면 된다. 하지만 그렇게 공들여서 찾아보고 싶지는 않다면 마지막 작품, 후기 철학을 위주로 탐독하면 된다.


이때 내가 권하는 것은 비어있는 공책이나 연습장을 하나 꺼내는 것이다. 나는 평소 필기가 되는 넓은 태블릿을 가지고 다녔기에 여기에 메모어플에 본격적으로 정리하였다. 정리하기를 주로 top-down 방식으로 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제일 위에는 내가 공부하고자 하는 철학을 적어두자 그리고 그 앞에 어떤 것이 있는지 살펴보자 예시로 내가 낙서장에 쓴 것처럼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궁금하다고 가정하자 그렇다고 이를 바로 시작하면 조금 버거울 수는 있다. 한걸음 뒤에서 접근을 해보자 합리주의가 있고 경험주의가 있다. 합리주의는 모든 것을 맹목적인 신앙과 믿음이 아닌 현상을 이성적으로 보자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라이프니츠나 데카르트가 있다. 경험주의는 과학적인 감각과 반복되는 경험을 중시를 한다. 대표적으로 흄과 베이컨이 있다. 이 둘은 배타적이지 않으며 보완적인 관계가 있다. 각각 놓고 본다면 완전하지 않음을 금방 알 수 있다.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보자고는 하였지만 사람은 완전하지 않다. 그리고 어디까지 이성적으로 볼 수 있는지 그 과정은 다소 불명확하다. 경험주의 역시 사람의 감각은 완전하지 않고 오작동을 할 때도 있다. 우리는 쉽게 상상하기 어렵지만 전투기 파일럿 조종사의 경우 중요하게 여기는 것 중 하나는 감각을 믿지 말고 계기판을 믿어라고 한다. 바다를 하늘이라 착각하고 처박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경험을 하더라도 다른 감각이 나올 수 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이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보자 순수이성비판을 풀어쓰면 "순수한 인간이성을 분석하자"는 뜻이다. 경험주의와 합리주의를 절충하여 우리의 오감과 지식으로 어떻게 객관적인 진실에 도달할 수 있는지 선구적인 시도를 하는지 살펴보면 된다.


나를 위한 철학

어디서 들었던 단어인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나는 종종 "자기철학"이라는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고 다녔다. 단순히 나는 어떤 철학자의 무엇을 좋아하는지 그치는 생색용이 아닌 나의 삶에 적용을 할 수 있는 내가 아끼는 철학을 만들었으면 한다. 이는 살아가는 데 있어 정말 큰 힘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어떤 단단한 사람을 보게 되고 흔히 그 사람들 표현할 때에 자기만의 철학이 있는 사람이라고 표현을 한다. 사회적인 지위, 소유하고 있는 재물을 떠나 자신만의 철학을 지닌 단단한 사람은 그 아우라가 있다.


오래전 썼던 글을 다시금 살펴보니 약간 중2병느낌 나는 오글거림이지만 그대로 적어보자면 누구나 힘들었던 시절을 한 가지 꼽아보라고 하면 대게 수험생 시절 일 것이다.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모르는데 장래희망을 적어라고 하고, 학과를 정하고 자기소개서를 준비하고, 목표하는 것과는 달리 오를 기미는 보이지 않는 성적에 학원도 못 가고 마음고생했는데 그럴수록 나는 철학을 붙들고 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 시절 나에게 힘이 되어준 철학은 동양철학의 '장자'였는데 장자는 사실 한 사람이 쓴 것이 아니라 여러 저자가 에피소드와 사상을 엮은 책이다. 그 이야기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대붕'이라는 새다. 이 새는 날개가 산을 덮을 정도로 큰 새이고 한번 날기 시작하면 수만리를 날아갈 수 있다. 하지만 대붕에게 큰 단점이 있었으니, 바람이 없으면 날지 못하는데 이 바람의 크기는 1년에 몇 번 오지 않는 태풍 같은 바람이다. 이 태풍이 오기 전에는 꼼짝없이 땅에 처박혀야 한다. 그렇게 하염없이 날지도 못하고 큰바람을 기다리자 참새가 옆에 와서 조롱을 한다. 나는 내가 날고 싶을 때 마음껏 날 수 있는데 너는 꼴이 뭐냐고 하면서 말이다. 여러분도 눈치를 채겠지만 우리는 참새를 전혀 부러워할 것은 없다. 참새가 날고 싶을 때 나는 일은 사사로운 일이다. 마치 점심밥 뭐 먹을지 고민하고 내일 무슨 옷을 입을지 고민하는 정도라면 대붕에게 있어서 태풍은 엄청난 시련과도 같은 일이다. 하지만 그 바람으로 수만리를 날아간다. 우리 인생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대붕에게 큰 바람은 수만리로 멀리 보내는 것처럼, 우리에게 시련은 더 멀리 더 높이 가기 위함이라는 장자의 이야기는 얼마나 큰 도움이 됐는지 모른다. 그때의 기억으로 나는 철학을 사랑한다.


니체, 실존주의 뭐든 좋다. 여러 철학을 둘러보고 마음에 드는 철학을 마치 덕질하듯이 파고들며 나의 것으로, 자기철학을 만드는 과정은 철학을 사랑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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