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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철학을 읽었는가

세상을 설명하고자 하는 열망

by Daniel J

아마 어떤 사람은 책을 읽을 때 로망으로 꼽는 것 중 하나는 두꺼운 역사책이나 있어 보이는 철학서를 카페에 앉아서 우아하게 읽는 것이지만 이는 분명 쉬운 일이 아니다. 철학 자체의 난해함 또는 책의 두꺼움 때문에 시작도 하기 전에 질려버리거나 같은 페이지만 반복해서 맴돌기마련이다. 결국 큰마음먹고 빌렸던 책은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가거나 책장 한편을 장식하게 된다.


철학의 첫 기억

나는 왜 철학을 읽었을까. 나에게 철학에 대한 첫 만남을 더듬어 보면 집 한편에 있는 "처음 읽는 서양 철학사 -저 안광복"을 중고등학생 때 수도 없이 읽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동양 고전으로는 "인문학 명강: 동양고전"을 고등학생 때 매일 한인물씩 읽어나가고 했다. 그거 읽을 시간에 수학문제 한 문제나 더 풀었으면 대학이 달라질까 라는 생각은 구석에 접어두고 나에게 있어 철학의 시작은 중고등학생 때 여러 번 반복해서 읽은 저 두 권이 전부다. 그리고 지금 다시 생각을 해본다면 정말 좋은 선택이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왜 좋은 선택이었는가. 가장 큰 이유는 철학을 어떤 고상한, 어려운 것이라는 인식보다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자세가 만들어졌다. 특히 "처음 읽는 서양 철학사"가 좋았던 이유는 바로 앞에서 말한 어렵지 않게 해설한 것도 있지만 철학자와 그가 주장하는 철학을 시대, 연도별로 쭉 나열을 해두었기에 개별적인 철학으로 깊게 들어가면 어려울지 몰라도 결국 큰 틀에서 시간순으로 보면 쉬운 철학사를 읽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 사람들은 어떻게 세상을 설명하고 싶어 했는지 알 수 있다. 우리가 아무런 도구가 없을 때에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았는지 이후 종교의 권위가 강할 때의 시선으로 세상을 설명하려고 시도하였는지, 그리고 르네상스를 거치며 다시금 사람에게 관심이 옮겨졌을 때 설명은 어떠한지. 어떻게 보면 철학은 단순히 학문이나 주장이 아닌 그 시대상을 해석하고자 하는 열망을 느낄 수가 있었다. Zeitgeist 시대정신처럼 말이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이어온 철학을 다듬어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반-정-합을 거치는 과정이 아름다웠고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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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명강: 동양고전"은 나에게 편견을 깨는 책이다. 우리에게 철학이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고대그리스의 플라톤 같은 서양적인 인물과 유럽이 먼저 떠오르겠지만 동양이라고 다르지 않다. 많은 철학이 발전하며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그 사람이 살던 시대상에 대해서 해설이 풍부한 것이 좋았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큰 위로가 된 부분이었다. 누군가는 유난이라고 하지만 한 번쯤은 겪고 힘들었을 고등학생 수험생 시절 가슴에 와닿았던 동양철학으로 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장자>를 수도 없이 읽었던 기억이 다시 떠오른다. 지금도 어려울 때 하늘을 나는 거대한 새, 대붕을 생각한다. "인문학 명강"이 나올 때쯤 사회적으로 힐링에 이어 인문학열풍이 강하게 불던때였는데 다시금 이를 살펴보는 날이 왔으면 한다.


내가 철학을 좋아하게 된 두 가지 이유를 다시 정리하자면 나의 철학은 쉬운 시작과 큰 위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세상을 설명하고자 하는 열망

앞에서 적어둔 세상을 설명하고자 하는 열망을 좀 더 풀어쓰자면 철학을 두고 교과서적이나 사전적인 정의는 보통 세계와 인간에 대한 본질탐구로 정리할 수 있다. 이런 설명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종종 주변사람에게 철학을 설명해 주거나 정리할 때 사용하는 문장은 "철학은 세상을 설명하고자 하는 열망"이라고 한다. 고등학생 때 과학교과서에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의 4원소설이나 돌턴의 원자설에 대해서 공부했던 기억이 있는지 모르겠다. '과학'적으로 보았을 때 어쩌면 배울 필요가 없는 내용이기도 하다. 이유는 현대에 와서 보면 모두 틀린 엉터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때 사람들은 이런 주장을 하였는지 배운다. 아직 현대적인 과학도구가 발전하지 못하였을 때에 앞선 사람들의 축적된 지식도 없는 상황에서 세상을 설명하려는 첫 시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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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설명하고자 하는 누군가가 첫 시작을 끊었다. 그리고 뒤의 사람이 다듬어 나간다. 철학은 그런 것이고 이런 것의 반복이다.


시간이 오래 지나 철학에 경험주의가 있었고 합리주의가 있었다. 물론 이 둘은 서로 배타적이거나 반대되는 개념은 아니다. 우리가 어떻게 지식을 받아들일 것인가 지식 체계의 기본 전제를 이성적 추론에 두느냐, 반복적 경험에 두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내가 만약 철학에 대해서 잘 모르는 상황에서 바로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을 바로 들어가면 굉장히 어렵다. 그 대신 앞선 사람들이 세상을 어떻게 설명하고 싶었는지 천천히 따라가 본다. 그렇게 경험론과 이성론을 살펴보고 이를 절충하고 설명하기 위한 시도를 보고 있으면 이제 칸트를 볼 준비가 된 것이다.


나의 위로가 되는 곳

대게 사람은 힘들 때 어떤 것에 몰두할 때가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종교가 될 수도 있다. 시작의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그 대상이 철학이었다. 철학 중에서도 특히 니체와 실존주의다. 누구나 한 번쯤은 그런 거 있지 않은가 나는 왜 태어났고 살아가는 것에 대해 의미를 찾으려는 어떤 형태의 질문을 던지면서 고민해보지 않았던가. 그런 허무함 속에서 방식과 대답은 다를 것이다. 유튜브에서 본 스님의 대답은 질문이 잘못되었다고 한다. 태어난 것 그 자체에 의미는 없다. 나는 의미 없이 세상에 던져졌고 이제 삶이라는 의미가 주어졌을 뿐이다. 또 다른 종교라면 "나의 삶으로 신의 의를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대답해 줄 것이다.


나는 니체에게 많은 위로를 받았다. 처음에는 약간의 선입견 때문에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염세적이고 허무한 철학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남들에게는 초인이 되어라고 하였지만 정작 본인은 정신질환으로 죽어가는 것을 보고 뭐 저런 사람이 있나 싶었다. 하지만 이는 초인의 의미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가 시작되었고 과학이 발달하였지만 여전히 종교의 힘은 막강하던 때다. 신은 세상이 만들어진 이유이며 삶의 목적인 존재다. 그런데 그 목적이 없는 세상이라면? 이보다 허무한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렇게 나온 니체의 선언은 "신은 죽었다." 그리고 동시에 초인(극복인)이 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였다. "신이 없는 세상, 목적이 없는 세상.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 자체가 나는 너무 좋았다. 한편으로는 무작정 초인이 되라는 주문은 불합리하다. 질문에 대한 명쾌한 해결책은 아닐 수 있다. 그저 감당하고 온몸으로 감내하라는 주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는 위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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