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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니엘 Dec 28. 2018

한 달 살기 로망은 집에 두고 오세요

베트남 한 달 살기 Day 1

지난 2개월 동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면서도 이따금씩 찾아오는 막연한 불안감이 나를 억누르곤 했다. 그럴 때마다 얼마 남지 않은 첫 '한 달' 휴가를 상기하며 나 자신을 토닥였다.

그럼에도 모든 일을 무사히 마치고 출국할 수 있겠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다행히도 모든 일을 차질 없이 마무리하고 손꼽아 기다리던 날짜가 다가왔다. 출국 전날 짐은 제대로 챙겼는지 두세 번 확인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공항으로 가는 리무진 버스 안에서 웹 체크인을 하였다. 덕분에 수많은 대기 행렬을 이루는 인파 속에 가장 먼저 체크인을 할 수 있었다. 탑승 시간까지 여유도 충분하다. 이민 수속을 마치자마자 라운지로 향했다. 마일리지를 모으기 위해 발급한 신용카드로 무료입장할 수 있다는 정보를 얻었기 때문이다. 라운지에서 자리를 잡은 후 식사도 하고 다양한 음료도 먹으며 책을 읽었다.


비행기를 탔다. 한국에서 하노이까지는 약 5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통로석을 선택했는데 아직 내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내 자리 짐칸의 공간도 여유로웠다. 최종 탑승객 입장 행렬이 이어지고, 제발 내 옆에 아무도 앉지 말아라,며 속으로 기도하였다. 마지막 사람이 내 쪽으로 다가오고, 이내 내 자리를 통과하여 지나갔다.


나이쓰!!!


좋은 일이 있을 때 속으로 외치는 말이다.


덕분에 비행기 안에서 편하게 있을 수 있었다. 오래간만에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이전에 청두에서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에서 덩치가 큰 서양 사람 두 명 사이에 껴서 가느라고 엄청 고생했던 생각이 났다.


신문을 읽다가 기내식을 먹다가 영화를 한 편 보고 잠시 멍을 때리다 보니, 이제 곧 착륙한다는 안내 방송이 들려온다. 자리도 앞쪽이어서 순조롭게 나와서 대기 없이 바로 베트남 비자를 신청하였다. 베트남에서 15일 이상 체류하기 위한 비자 서류도 미리 작성해 두었다.


"저기 앉아서 기다리면 이름을 부를 거예요"


비자 사무소 직원이 말했다. 잠깐 기다렸을까 어느 순간 비자 신청 카운터 줄은 사람들로 꽉 찼다. 10분 정도 기다렸을까? 이름이 호명되더니 $25를 지불하고 비자를 바로 발급받았다. 그 사이 출입국 심사대 줄도 짧아졌고 별 대기 없이 통과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순조롭다. 비자까지 발급받았는데 비행 도착 예정 시간인 9시 즈음에 짐을 찾으러 나왔다. 이번 여행, 베트남에서의 한 달이 모두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거의 완벽하다...! 짐만 찾으면 여유롭게 환전도 하고 현지 심카드도 살 수 있다.


내 캐리어가 나오길 기다린다. 테이프로 꽁꽁 싸맨 박스들이 나온다. 또 박스가 나온다. 물티슈, 청소기, 이불, 그리고 정체 모를 물건들까지. 한국을 방문한 베트남 사람들이 한국 여행 중 사 온 물건들이다.

15분이 지났다. 간간히 캐리어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직도 박스들이 줄줄이 나온다.

이제 곧 내 캐리어도 나오겠지,라고 하며 나를 안심시킨다.

30분이 지났다. 박스가 그만 나올 때도 되었건만 아직도 연이어 나온다... 뭔가 예감이 좋지 않다.

40분이 지났다. 캐리어들이 이제 눈이 띠기 시작한다. 짐을 기다리는 행렬도 줄어들었다. 현지 택시를 출발 전 예약해 놓았다. 와이파이도 잡히지 않아 연락을 못해 슬슬 걱정되기 시작한다.

50분이 지났다. 포기하고 기다리는 사이 멀리서 익숙한 캐리어가 보인다.

드디어 내 캐리어가 나왔다! 9시경에 나왔는데 10시가 거의 다 되어서야 캐리어를 찾을 수 있었다.

어쩐지 모든 게 순조롭지 싶었다...


유행이 한참 지난 클럽 음악을 크게 틀어놓은 택시에 몸을 맡기고 하노이 시내로 향한다.


드디어 에이비앤비 숙소에 도착!


한적한 골목에 주택가를 리모델링한 곳이다. 짐을 풀고 출출함을 달래기 위해 늦은 밤까지 영업하는 비어 스트리트로 향했다. 생맥주(Bia Hoy) 한잔과 스프링롤을 주문했다. 더할 나위 없는 조합이다.


그런데 뒤에서 만취한 외국인과 현지 점원이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같은 곳에 있는 다른 손님들이 불편할 정도로. 시간이 늦어서 그런지 만취한 외국인들이 많았다. 이건 아니다 싶어 시킨 것만 먹고 다시 숙소로 향했다. 돌아가는 길에 쌀국수를 먹을 수 있는 조용한 노점이 있기를 희망하면서.


고민하는 사이 숙소에 거의 다 도착하였다. 오늘은 내일을 위해 이만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며 피로를 풀 생각을 하니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보일러를 켜고 샤워를 하기 위해 물을 틀었다.

어라...

물이 조금 나오다가 이내 나오질 않는다. 샤워기는 인테리어용이고 샤워헤드만 작동하는데 이마저도 물이 잘 나오질 않는다. 호스트에게 물어보니 오래된 건물이라 수압이 약하다고 한다. 계속 틀어놓으니 몇 분이 지나서 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니, 졸졸 흐른다고 해야 더 맞겠다.


5분이면 될 샤워를 20분 동안이나 했다.

방 안 모든 창문도 인테리어용으로 나무만 덧대어 놓아서 바람을 막아주지도 방음을 해주지도 못한다.

힘겹게 샤워를 끝내고 책을 들고 침대에 누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외부에서 들려오는 경적소리가 들린다. 근처에서 공사 중인지 밤늦게까지 쇠를 망치로 두드리는 소리, 드릴 소리 등이 들린다. 바로 옆에서 들리는 소리처럼.


갑자기 에어비앤비 리뷰를 단 투숙객들이 원망스러웠다. 수압이 낮다는 리뷰도, 옆에 공사 중이라는 리뷰도 분명 없었다.


아차, 싶었다. 숙소를 알아볼 때 사진만 믿고 덜컥 예약한 것이다. 여기서 8일을 지내야 하는데...

들어오다 보니 사진에서 봤던 발코니는 바로 옆 현지 주민과 문을 공유하는 구조였다. 게다가 밖에서 다 볼 수 있는 유리문 현관이라니... 커튼이 있었지만 이마저도 그 큰 현관 유리를 다 가려주진 못했다.

일단 자려고 했으나 그놈의 쾅! 쾅! 소리 때문에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후회가 막심했다.

내 첫 한 달 여행의 시작을 이렇게 망칠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불 정책을 알아봤다. 50% 환불이 가능하다고 한다. 계속 고민하다가 새로운 숙소를 알아보고 환불 진행을 하는 게 더 스트레스받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기하게도 대안보다 현재가 더 낫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여행에 들뜬 나머지 안락하고 편안한 공간을 상상하다가 기대를 낮추니 현재 상황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첫날의 경험을 통해 느꼈다. 아무리 준비를 많이 해도 완벽한 여행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어차피 여유롭게 쉬러 온 것이니 마음을 편하게 가지면 된다는 것을.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라고 한탄을 하기보다는 그냥 있는 그대로를 즐기든지,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면 된다.


내 한 달 살기의 목적을 상기해본다. 휴식, 그동안의 삶을 정리하는 일 외에도 '현지인의 삶을 있는 그대로 느끼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호텔이 아닌 현지인의 집을 숙소로 정했다.

불편함도 피하려 하면 내성이 더 강해져 나를 괴롭힌다. 받아들이면 삶의 일부가 되어 나를 더욱 풍요롭게 만든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여행의 로망을 꿈꾼다. 아침이면 햇살이 따스하게 비치는 공간에서 잠을 깨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현지인의 정을 느끼는 경험을 기대한다. 운이 좋다면 이러한 로망이 이뤄질지도 모른다. 변수가 적은 단기 여행에서 말이다. 장기 여행에서는 로망은 갖되 자신의 계획대로 모든 것이 이뤄질 거라는 생각 자체가 욕망이다.


그동안 수많은 여행을 했음에도 '완벽한' 여행은 없었다.

좋은 일이 있기도, 나쁜 일이 있기도 했다. 각 여행에서 그 비중만 다를 뿐. 마치 일상생활처럼.

그렇다고 좋은 경험과 나쁜 경험의 횟수나 정도를 계산하지 않았다. 어떤 몇 가지 경험만이 여행과 그 나라의 인상을 결정했을 뿐이다. 그리고 기대가 클수록, 가볼 곳과 먹을 곳의 리스트가 많을수록 쉽게 만족하지 못했다.


베트남에 도착한 첫날, 이번 여행의 로망이 깨졌다. 짜증이 났다.

덕분에 이번 여행의 기대치가 낮아졌다. 욕심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이윽고 기분이 괜찮아졌다.

그리고 나는 숙면을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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