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딱 한 번 누드화를 그려본 적이 있다. 대학교 해부학 수업에서였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문을 열고 들어온 모델은 강의실 바닥에 옷을 벗고 앉았다. 몇분이 지나자 누워서 오래 같은 포즈를 취했다. 나는 뻘뻘 나는 땀을 훔치며 아무렇지 않으려 애썼다. 그 몸이 뿜어내는 나른함과 고단함을 스케치북에 담아내느라 손도 눈도 바빠지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몸을 그렇게 자세히 들여다본 건 처음이었다. 그 선명함 앞에 엄마가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내보이던 옆구리와 허벅지도, 애인의 다리에 수북이 있던 털의 흔적도, 욕실에 함께 구겨져 목욕을 하곤 했던 언니의 자그마한 몸도, 그저 살덩이로 기억될 뿐이었다.
그 후로 내 몸을 유심히 관찰하는 버릇이 생겼다. 나는 가슴 한 쪽에 자꾸만 뜯어내도 털이 한 자락씩 자란다. 참외 배꼽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게 영 못마땅해 배꼽티는 입지 않으려 애쓴다. 입고 싶어 안달이 나는 날엔 하이웨스트 바지를 한껏 추려 입어 배를 가리곤 한다. 내 새끼발톱은 아주 작아서 새끼손가락의 2분의 1만도 못하다. 골반과 엉덩이는 오돌토돌해서 만지면 기분이 썩 좋진 않다. 팔뚝에 있는 점으로 가끔 코끼리를 만들고 혼자 킥-하고 웃는다. 어깨가 축 처져있어 가끔은 세모져 보인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어쩔 땐 어깨에 힘을 빡 주고 다닌다. 그럼 사진이 잘 나온다.
내 마음에도, 내가 하는 생각들에도 가끔씩 고개를 젓고는 한다. 부정하고 알지 못한다고 질타할 때도 있다. 하지만 내 몸을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다. 누군가의 몸을 그렇게 오래도록 바라볼 수 있는 기회는 사랑하는 사람의 몸을 쓰다듬고 눈에 담으려 애쓰는 순간과 누드화를 그리는 순간, 둘뿐이지 않을까? 전자의 경우를 다채롭게 경험해본 기억도, 남을 만한 순간도 없고, 누드화 모델을 서 본 일도 없으니 내 몸을 아는 사람은 나뿐임이 분명하다.
나를 분명하게 아는 게 하나라도 존재한다니. 어쩐지 나에게 조금 떳떳해진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문득 사랑도, 일도, 누군가를 다정하게 대하는 것도 모두 ‘체력’에서 비롯된다던 누군가의 글이 생각났다. 내 몸을 잘 아는 만큼 나의 체력 또한 익히 알고 있던 나는, 곧 떳떳해진 마음을 수그러뜨렸다. 오래 운동하지 않은 몸의 습관은 조그마한 체력 소비에도 금세 지치고 만다는 사실이 그제서야 생각났다.
낯선 곳에서 낯선 거울에 비추어 일주일 전보단 한층 낯설어진 내 몸을 들여다본다. 전엔 보지 못했던 점이 자리해있는 게 눈에 띈다. 그 점을 멍하니 만져보다 얼마 전 만난 지인의 말을 떠올렸다. “운동하면 모든 게 나아져요”. 그 사람이 말한 ‘모두’란 어떤 것이었을까, 몸도 마음도 전보다는 나아진 다는 이야기였을까? 어찌 됐든 나아질 그 모든 것들을 위해 몸의 구석구석을 만져주고 녹슨 기계를 만져주듯 조금씩 움직여주는 건 지금 나의 몸에 할 수 있는 최선의 일과일 거다. 나의 몸을 잘 알지만, 그 몸을 사랑해본 적은 없는 나를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