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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다 Feb 14. 2019

어두운 정오


어릴 때부터 비 오는 날을 좋아했다. 어두운 게 좋았고, 암막커튼 없이도 어두운 정오를 보낼 수 있는 방법은 비가 내리는 순간뿐이었다. 비가 오면 집 안 곳곳에 축축한 냄새가 났다. 여름에도 두꺼운 이불을 덮고 누워 있을 수 있었다. 그건 겨울에 난방을 틀어놓고 반팔로 거실을 활보하는 것만큼이나 아주 재밌고 특별한 일이었다.


마나우스에 오고서부턴 오후 4시만 되면 졸음이 쏟아졌다. 예민하고 신경 쓸 일이 많을 때면 늘 잠을 자지 못했던 나는, 시간을 분으로 쪼개 살던 한국에서의 시간이 먼 기억 같았다. 가만히 앉아 책을 보더라도, 어느새 몸은 기우뚱, 눈을 반만 뜬 채 애써 홉뜨려 노력했다. 그리곤 이내 지쳐 방에 들어가 누우면 핸드폰을 붙든 채로 풀썩 잠에 들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 잠에 든 밤 10시와 아침 7시 사이, 오늘은 두 번, 잠에서 깼었다. 그리고 완전한 기상에 눈을 떴을 때 하늘은 흐린 빛을 띄고 있었다.


브라질에선 우기가 되면 쨍쨍한 햇볕이 그득하더라도, 곧 어두워진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곤 했다. 나는 그 변덕을 알지 못해 한국에선 부러 두고 다니던 우산을 챙겨나갔다. 처음 혼자 집 근처 카페에 가던 그제는 이방인의 행색을 한 나에게 온통 시선이 따라붙었다. 비가 오고, 우산 없이 비를 맞고 집까지 가야 한다면 나는 또 얼마나 처량해질까?


마나우스 언니 집 근처엔 5분 걸려 카페가 하나 있었다. 어제는 그 카페에 가서 바닐라 라떼, 젤라뚜-(아이스)를 시켜놓고, 빵빵한 에어콘 맡에서 책을 읽었다. 그러다 공연히 창밖을 바라보고 싶어졌다. 너무 쨍쨍하고 파랗기만 했던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있었다. 2층에서 보기엔 창문은 바닥으로만 나있어서, 직접 비가 내리는 건 알 수 없었다. 카페 앞에 놓인 드럼통에 고인 물에 빗자락이 토독토독 떨어졌으니, 시작됐구나, 생각할 뿐이다. 집으로 귀가하는 시간을 유예시켰다. 사람들은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꺄르르 웃고 지나갔다. 가방 속 초록 체크 우산이 어쩐지 우스워졌다.


한국에서 비가 오는 날을 감지하는 건 내 몫이 아니었다. 친구들이 말해주면 그렇구나-답하면서도 우산 챙기길 꺼려 했다. 올지도 모를 비 때문에 내내 무겁게 다닐 가방이 거슬렸고, 축축해진 우산을 들고 지하철과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는 게 번거로웠다. 기어코 우산을 챙기지 않은 날 비가 내리면 그대로 맞고 집에 들어와 찝찝해진 몸을 갈아끼우듯 깨끗한 물로 쓸어내는 게 기분 좋았다. 더럽고 찝찝한 마음은 털어내고 재탄생하는 기분이 들곤 했으니까. 비가 온다는 건 번거로우면서 어떤 땐 새로운 마음이 들게 한다. 미우면서 좋다.


근처 백화점에 다녀오려던 오늘의 계획은 비로 인해 무산되었다. 그리고 비 덕분에 미뤄뒀던 오늘의 일기와, 재밌지만 무섭기도 해서 밀쳐두었던 책, 오래만에 보는 로맨스 드라마를 몇 퍼센트의 죄책감을 상쇄시킨 채 감상했다. 빗소리를 쉼표 삼아 하루를 보내고 나니, 어느새 비는 멈춰있었다. 그리고 물웅덩이를 찰박이며 걸어가는 사람들의 발소리와 내용을 알 수 없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 모습을 한동안 바라봤다. 쨍쨍한 햇볕을 기다리는 사이, 어두운 한낮이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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